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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Oct 29. 2022

가을 호숫가에서

아파트(밖)에서 즐기는 사계

브런치 북 프로젝트에 참여하느라 갱년기에 대한 글을 다시 다듬으면서 며칠을 보냈다. 오늘에야 가을이 온 것을 몸으로 느껴보려고 길을 나섰다. 오늘만큼은 아파트 안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거다. 차로 10분 거리의 호숫가로 갈 예정이다. 가끔은 밖에서 안을 보는 것도 좋다.


가을이 느껴져?

운전을 하던 남편이 물었다.

응. 완전. 나무가 전부 헬렐레, 하고 있잖아.  

울긋불긋한 나뭇잎들만이 아니라 사시사철 푸른 나무들조차 가을을 이기지 못하고 한껏 늘어져 있었다. 갈대밭 위로 데크길이 보였다.  

여기야, 바로! 

내가 소리치자 남편이 재빨리 길 건너 빈 공간을 찾아냈다. 우리는 참 운도 좋지, 룰루랄라 하는 마음으로 주차를 했다. 

호수에 잠긴 갈대는 바람에 이리저리 넘어지고 짓밟힌 상태였지만 산길 옆 갈대는 쭉쭉 뻗어 키가 아주 컸다. 남편이 손을 뻗어 갈대를 찍다 말고 오늘도 갈대밭에 저 홀로 우는 새는~~하면서 타령을 해댔다. 어쩌다 흘러나오는 노래들이 대부분 최소 40년은 넘은 곡들이다. 어릴 때 들은 노래는 몸 속 어디에 숨어있다가 잊혀지지도 않고 어느새 새어나오는 걸까. 

길은 호숫가를 따라 길게 이어졌다. 반짝반짝 윤슬이 빛났다. 잠시 서서 사진을 찍고 웃었다.

산모퉁이를 돌자 호숫가 가까이로 내려가는 길이 이어지고 켜켜이 쌓인 모래톱을 발로 밟을 수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던 때와 달리 물이 가슴까지 차올라 물속에서 고개만 내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늘진 물결이 일렁이면서 내 몸도 일렁였다. 윤슬이 사라진 물결은 바람결이 아니라 호수 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지구의 파장인 것처럼 묵직하게 흔들렸다. 내 숨인지 호수의 숨인지 모르게 같이 헐떡이던 물결이 꿀꿀꺽 나를 삼키는 듯했다.


모퉁이를 살짝 돌았을 뿐인데, 빛나던 윤슬과 웃음소리가 바로 전인데, 산그늘이 조금 드리웠다고,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고 순식간에 덤벼드는 어둠과 그림자. 갱년기 글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나 보다. 뻔히 보이는 흔들림의 착각에도 오금이 저렸다. 몸을 벌떡 일으켜 뒤로 한 발 자리를 옮겼다. 아예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겁먹지 않고 즐기리라, 마음먹었다.

물결은 잔잔했다. 다만 한 걸음 움직였을 뿐인데 그늘은 어둠이 아니라 음영이 되었다. 가끔 아래로부터 포말이 올라오기도 하고 멀리 오리가 풍덩, 소리까지 내며 물속으로 고개를 처박기도 했지만, 고요하게 곁을 허락했다. 아름다웠다.



제목은 잊어버렸는데 오토바이 뻑치기 범죄를 다룬 영화였다. 보는 내내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만 보고 싶었지만 끝까지 보지 않으면 그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을 거 같아 계속 봤다. 보통 범죄영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카타르시스를 주면서 마무리되니까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영화는 답답하게 지지부진하다가 그대로 끝나버렸다. 미칠 것 같았다. 뒷덜미가 서늘해서 도저히 그냥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차라리 다른 영화를 하나 더 봐서 이 영화를 덮어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선택한 영화가 <살인의 추억>이다. 왜 또 범죄영화냐면, 뻑치기가 내 뒤통수를 치는 와중에 달콤한 로맨스나 시끌한 코미디를 보며 웃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도저히.  

알다시피 <살인의 추억>도 무서운 연쇄살인범에 대한 영화고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하는 걸로 끝난다. 하지만 잘 만든 영화였다. 탄탄한 시나리오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배우들의 연기력과 마지막의 여운까지 충분히 예술적이었다. 두려움에 갇혔던 눈이 호기심으로 커졌고 쪼그라들었던 간이 펴지면서 다시 흐르는 시간 위에 서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깨달았다. 두려움을 예술로 잠시 잊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생에 대한 상징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없는 세계에 툭 떨어져 주어진 시간을 버티다가 다시 알 수 없는 세계로 넘어간다. 인류는 끊임없이 우리가 떨어진 세계를 탐구해왔지만, 여전히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자연의 변화를 주의 깊게 지켜보다가 신이라는 존재 뒤에 숨었다가 사회를 형성해서 남에게 기대었다가 개인이라는 제각각의 존재를 자각한 것이 전부다.

빈 공간과 유한의 시간이 주는 두려움을 이길 방법은 없다. 그저 잠시 잊을 뿐. 뻔히 보이는 두려움을 피해 아름다움 속으로 숨고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피해 예술로 뛰어든다. 그것만이 지금 이 세계에서 견딜 수 있는, 가끔은 깊은 안식을 맞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예술을 통해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인식이 열리고 스스로 상상할 수 있기를. 잠시 허락된 세계를 조심히 쓰고 가는 것, 허공 같은 세계를 응시하는 것, 세계 너머를 상상하고 기웃거리는 것, 이방인으로 사는 것. 잊지 않기를.


돌아오는 길, 조금 천천히 달리라고 했다. 호숫가에 서있는 내 영혼이 나를 따라올 수 있게. 차에서 내리자 어느새 다가온 내 영혼이 성큼성큼 집으로 걸어 들어간다. 집이다! 바보같은 영혼이 가을의 아름다움에 속아 내일도 살아갈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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