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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Nov 15. 2022

스산한 가을을 목도할 때

아파트에서 즐기는 사계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아파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주방에 서서 밥을 할 때마다 내 머리 위에서도 누군가가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감자를 깎아 된장을 끓이고 있겠지, 어쩌면 아이가 바지춤을 붙잡고 칭얼거리는 것까지도 똑같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침대만은 남들처럼 벽에 딱 붙이지 않고 한가운데에 놓았다. 침대 위에 층층이 쌓여있는 모습에서 조금은 비껴 나고 싶어서.


콘크리트로 쌓아 올린 건축물에 있다 보면 금세 하품이 나오고 피곤해졌다. 예전에 회사 다닐 때는 자주 화장실(열리는 창문이 거기뿐이었다)에 가서 창문을 열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건물이라는 게 안과 밖이라는 개념을 분명하게 나눠버린 것 같다. 안과 밖은 나와 타인을 구분 짓고 인간의 공간과 자연의 공간으로까지 구분 지어버렸고, 내 공간 외에는 나 몰라라 하는 습성까지 만들었다. 주택보다 아파트가 깨끗하다는 인식이 있는데, 결국 안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밖으로 밀어내 버리는 것일 뿐, 정말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더러운 것이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흙과 먼지를 차단하고 바람을 차단하는 것이 깨끗하고 안전한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그렇게 개인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건물의 역할이라고 믿게 된 듯하다. 자연 속의 인간이 아니라 자연을 배제한 인간 중심의 관점이 뿌리내린 것도 어쩌면 건물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거창하게 말했지만, 실은 어릴 적 기억 때문이다. 빗자루로 청소하던 시절, 쓸어서 쓰레받기에 담고 마지막 남은 먼지는 마당으로 휙 쓸어버렸는데, 아파트에 오니까 그걸 할 수가 없었다. 높은 문턱 앞에서 몇 번이나 쓸어 담아도 미세한 먼지까지 담을 수 없어서 답답했던 기억. 그게 건물, 아파트에 대한 거부감의 시작이었다. 유난스럽게 아파트는 깨끗함을 요한다. 밖에서 놀다 옷과 양말에 흙이 좀 묻어도 마당에 대고 툭툭 털면 그만이었는데 흙 묻은 신발이 당연했던 때를 잊고 현관에도 흙이 있는 꼴을 보지 못한다. 하긴 아파트에서는 흙이 묻을 기회 자체가 없기는 하다. 어쨌든 나는 좀 안과 밖이 불분명해서 흙이나 먼지가 들고 나고 앉은자리에서도 나무가 보이고 바람도 통하는 게 좋다.      


그래서 아파트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하기에 좀 민망한 것이 아파트에서 살아본 경험이 길지 않다. 결혼 전에 부모님이 처음으로 아파트로 이사를 갔을 때는 잠시 잠깐 들어가 잠만 잔 게 전부였고, 내 의지로 아파트를 선택한 것은 첫째가 3살 무렵인데, 그때 선망했던 아파트가 생각보다 편하지 않구나, 처음 생각했다. 첫째가 대안학교에 갈 때도 급하게 이사를 하느라 아파트로 갔는데, 호시탐탐 다른 곳으로 이사할 궁리를 했다.  

이번에 아파트로 온 것은 잠시만 살 계획이어서 쉽게 거래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커다란 나무들을 봤고 길가에서 호박이니 나물을 파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그런 게 좋아 엉거주춤 눌러앉게 되었다.

다행히 우리 집은 아주 오래되어서 아파트치고는 방온이나 방풍이 덜 되는 편이다. 요즘은 대단한 편의시설이 있는 아파트들이 많아서 아파트가 얼마나 편한데 그런 소리를 하냐고 하겠지만, 나는 다행히 대단한 편의시설을 갖춘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없어서 지금이 딱 좋다.


아파트를 싫어하는 것은 남편도 마찬가지여서 가끔 이사 얘기를 하는데, 그때마다 내가 살아온 모든 곳을 떠올려보면서 지금 만족도가 꽤 높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그동안 살아온 집 근처에 낙엽을 밟으며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었던가(있어도 차도와 가까워 매연과 소음이 심했다). 낙엽 지는 풍경을 창으로 내다볼 수 있었던가(보이긴 하지만 인도가 없어서 나가서 걸을 수는 없었다). 아침이면 사락사락 낙엽 쓰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깰 수 있었던가(봄이면 꽃을 쓸고 가을이면 낙엽을 쓸고 겨울이면 눈을 쓸어주시는 아파트 경비원님들, 감사합니다). 여기는 그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은가(대단한 아파트들도 그럴 수 있는 곳이 많겠지만 내가 들어갈 곳은 없다). 아, 참 좋구나.      


올 가을도 그렇게 만족감으로 가득했다. 매일 붉어지는 가을에 대한 글을 아껴두었다. 반짝이는 은행잎에 대한 찬사를 하려고, 사방으로 톡톡 튀는 씨앗 이야기를 하려고 11월 1일을 기다렸다. 굳이 11월 1일을 기다린 건, 경험상 은행잎이 가장 반짝반짝 아름다운 때는 10월 말, 11월 초였기 때문이다.

가로수에서 떨어진 은행 냄새 때문에 흉측한 모양의 은행털이 기구를 씌워놓곤 하는데, 사실 은행나무는 그런 취급을 받을 존재가 아니라는 이야기, 우리나라에서는 은행나무가 흔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은행나무는 멸종위기종의 하나라서 밖에서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는 이야기, 공룡시대로부터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명체로 야생으로 자라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는 이야기. 미관상으로도 그렇고 더 많은 종의 번식을 위해서도 냄새 정도는 조금 참아보자는 이야기 등을 하려고 은행나무를 볼 때마다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식물은 평생 한 자리에서 살지만, 딱 한번 멀리 날아가는 때가 있는데 바로 씨앗이 익을 때라고,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풍선초나 봉선화처럼 씨앗 스스로 펑 날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낙엽만 보지 말고 공중으로 펑펑 터지는 씨앗도 살펴보자는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이 얼마나 신나고 멋진 이야기인가.   

   

그런데 반짝이는 은행을 말하기에는, 펑펑 날아다니는 씨앗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슬픈 일을 겪었다. 허망한 마음으로 며칠을 보내고 나니 은행잎은 이미 다 지고, 플라타너스와 느티나무 잎이 누렇게 땅을 뒤덮었다. 치워도 치워도 쌓이는 낙엽이 뒹굴고 쉬지 않고 긁어모은 커다란 포대가 쌓이고 그래도 발에 차이는 낙엽이 바람에 날리는 스산한 풍경이, 차라리 위로가 된다. 어릴 때는 이런 스산한 계절을 더 좋아했더랬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흩날리는 벚꽃 잎을 보며 웃지 못하게 하더니 은행잎도 그렇게 되다니. 떨어지는 것들은 왜 이다지도 슬픈 것이냐.       

계절을 누리고 즐기려고 쓰기 시작한 글이 갈피를 못 잡고 헤맨다. 쓸쓸한 풍경에 눈을 주고 바스락 소리에 화들짝 놀라면서 살아있음을 자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일상을 살아야 하므로 쓰기로 한 것을 쓰고 있지만, 동시에 슬픈 일을 잊지 않고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도 써나갈 것이다. 춥고 긴 겨울이 오겠지만,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온다. 지금은 스산한 가을을 목도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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