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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May 23. 2024

보리가 자란다


아파트에서 기찻길 옆 산책로로 나가는 입구에 누군가 땅을 일궈 텃밭을 만들었다. 도농지역에서 살다 아파트로 온 나는 텃밭이 무척 반갑다. 처음에 아파트로 이사 오고 한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텃밭을 보고야 숨통이 트였던 사람이다. 관리사무소에서는 텃밭을 만들지 못하게 수시로 안내를 하지만 나는 그들이 몰래몰래 계속 만들어주기를 속으로 응원한다. 화단은 아무리 잘되어있어도 텃밭만 한 기쁨을 주지 못한다. 이왕이면 먹을 수 있어야지. 뼛속까지 실용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 것 같다. 예전에 마당 있는 집에 살 때도 온통 과수를 심었다. 매실나무, 뽕나무, 앵두나무, 감나무...     

입구 텃밭은 몇 년 동안 내 눈요깃거리가 되어주었다. 산책을 나갈 때마다 마치 내 밭을 들여다보듯이 요리조리 살피면서, 아이고, 오늘은 열무를 뽑으셔야겠는걸, 저러다 쇨라, 호박이 조막만 해졌으니 내일새벽에 따면 딱 되겠다, 파꽃을 피우는 거 보니 씨를 받으시려나... 농사일지라도 쓸 듯 혼자 온갖 참견을 다하곤 했다.

 

올해 봄이 기지개를 켜던 어느 날, 산책을 나가다 우뚝 서버렸다. 저것은! 아주 반가웠지만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안타까움이여. 밀과 보리가 자란다 밀과 보리가 자란다~ 노래를 부르면서도 밀과 보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았던 과거의 나를 매우 치며 얼른 검색해 보니, 보리란다.

와, 여기에 보리를 심으시다니, 감탄. 뒤로 아파트가 보이게 사진을 찰칵, 앞에 호박이 조금 보이게 찰칵.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혹시 청보리 아냐? 추측하는 남편의 말을 듣고 진짜 청보리이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뭐여도 상관없겠지만 그래도 청보리를 실제로 보는 기쁨을 위해서.


오늘, 햇볕을 받는 곳은 누렇게 익어가는 걸 보니 청보리는 아니다. 이제 청보리가 아니어서 더 좋다. 점점 황금빛으로 변해갈 테니까. 이번에도 내것도 아니면서 보리가 익어가는 모습에 즐거워하며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농부들에게 지원금을 지급해야 하는 이유는 식량주권을 지켜야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푸른 들판을 볼 수 있게 해주는 환경적인 측면도 있다고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들판에 시커먼 태양열 패널은 이제 그만 설치했으면 좋겠다. 아무리 재생에너지를 위해서라도 건물 위라면 몰라도 산과 들을 뒤덮는 건 지나친 것 같다.      


근데, 어떻게 저렇게 작은 텃밭에 보리를 심을 생각을 하셨을까. 조금이라도 직접 심어 먹는 보리는 더 맛있겠지? 타작도 직접 하시려나? 이제야 이 텃밭 주인이 몹시 궁금하다. 눈을 즐겁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라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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