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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un 28. 2024

꽃이 없어도 괜찮아, 무화과

얼마 전 발목이 삐끗해서 한의원에 한참 다녔는데, 이상하게 통증 부위가 여기저기로 돌아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정형외과에 가서 사진을 찍어봤더니 무슨 일을 하길래 이렇게 무리를 하셨냐고 놀란다. 

네?... 매일 집에만 있는 집순인디요...

발목 삔 것과는 전혀 상관없고 뭔가 일을 많이 한 사람 발목이라는데, 이게 대체 뭔 일인지. 집안일이라 해봤자 내 먹을 거 해 먹는 게 전부고 움직여봤자 책 읽으며 거실을 서성이는 정도인데 도대체 얼마나 부실하면 그 정도 움직이고 사는데 발목이 작살나는 걸까.


병명은 기타 윤활막염 및 힘줄윤활막염. 약 잘 먹고 찜질 잘하고 푹 쉬라고. 푹 쉬라는 말에 웃음이 푹 나온다. 몇 년째 푹 쉬는 중이라 다음 달부터 본격적으로 운동이라는 걸 좀 해보려고 마음먹었는데. 운동이 필요하지만 운동을 할 수 없는 슬픈 몸이어서 엄두를 못 내다가 요즘 컨디션이 좀 괜찮아진 것 같아 바로 어제 수영을 등록했는데. 장롱 깊숙이 넣어둔 수영복도 꺼내고 물안경도 새로 주문했는데.

그래도 일단 시작해 보련다. 뭐든 안간힘을 써야 남들만큼 할 수 있지만 이제는 안간힘 쓰지는 말고 해보다 안되면 잠시 멈추고, 다시 시도하고 멈추고, 그렇게 즐길거리 하나 더 늘린다는 마음으로 해보련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요즘 운동과 근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나는 좀 저항감이 있다. 중년을 잘 보내기 위해 갱년기 전에 꼭 근육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나이 들고 근육이 퇴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이가 많아도 근육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마치 공부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거나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뭐든지 개인의 노력을 탓하는 풍조.

노인이 되어서도 근육을 만든 사람은 그 사람만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것뿐이다. 그 사람이 그걸 해냈다고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왜 우리는 그동안 올림픽 선수들처럼 잘 달리거나 잘 던지거나 잘 뛰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말을 하니 생각난다. 어릴 때 아버지가 내게 가만히 앉아서 공부만 하는데 왜 잘하지 못하냐고 나무란 적이 있다. 학교에 가고 싶어도 머슴처럼 나무하고 밭일을 해야 했던 아버지 입장에선 일도 하지 않고 공부만 하는 내 처지가 부러웠을 것이고 가만히 앉아 공부하는 게 제일 쉬워 보였을 것이다. 원래 남의 삶은 쉬워 보이는 거니까. 그때 나는 왜 아버지는 돈만 버는데 왜 돈을 많이 못 버시냐고 되물었다. 두고두고 낯 뜨겁고 죄송스러운 일이다.

이야기가 산으로 갔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우리는 각자 다른 몸을 살고, 누구나 취약한 점이 있다. 정상성에 우리 몸을 가두면 나이 드는 것까지 비정상으로 외면한다. 노오오오력, 발전주의, 능력주의, 성취중심을 벗어나 각자의 변방을 다지는 것. 변방을 사회로 끌고 오는 것. 즉 노인이 많아지는 사회에서 건강한 몸과 튼튼한 근육을 강조하면 할수록 의존을 죄악시하게 되고 노인을 위한 사회는 점점 멀어진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야 건강하게 자립적으로 살면 가장 좋겠지만 우리는 지금껏 남들의 도움으로 살아왔다. 앞으로는 더욱더 남들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다. 절대로. 의존이 당연한 세상, 다양한 취약점을 인정하는 목소리가 커지면 좋겠다.    


이야기가 숭덩숭덩 건너뛰었다는 거 잘 안다. 아픈 곳은 발목인데 마음부터 무너지지 않으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이것도 나의 취약한 부분을 방어하기 위한 발악이겠지만, 결국 취약한 사람이 안전지대를 만드는 법이다.


아, 무화과 이야기를 하나도 못했네. 산책을 금지당하면서 전에 찍은 사진 중에 골랐다. 무화과는 꽃이 없어 무화과다. 자연에서는 꽃이 없다는 것이 전혀 취약점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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