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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장님의 영어 비결

상사와 떠나는 해외출장 필살기 (6)

by 스티뷴

해외출장에서 모두가 부딪힐 수밖에 없는 난관, 영어에 대하여 이야기해본다.


"돈 쓰는 영어는 쉽지만 돈 버는 영어는 어렵다."


미국 투자은행의 한국 지사에서 일하는 지인에게서 들은 촌철살인이다. 돈 쓰는 영어를 하러 가는 길은 즐겁다. 현지에서 돈은 마법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어느 나라에서 건 다들 척척 알아듣는다. 그러나, 우리는 여행이 아니라 출장을 가지 않는가? 돈 쓰는 영어로 끝나면 좋은데, 돈 버는 영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 다들 수준 높은 영어를 구사하고 싶은 마음은 같을 것이다.


당신이 영어를 써야 할 상황은 다음의 몇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입출국, 호텔 체크인, 관광 등 여행자로서의 돈 쓰는 영어

해외 상대방과의 일대일 면담

국제회의. 단순 참가면 문제 될 것이 없으나, 상사나 나의 명패가 지정된 자리가 있고, 어젠다들에 대하여 코멘트를 해야 하는 상황

국제 콘퍼런스에서의 파워포인트 주제발표


이 중에서 가장 공포스러울 국제 콘퍼런스에서의 주제발표에 대하여 이야기해본다.

위에 열거한 나머지 상황은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한 것들이다. 먼저 돈 쓰는 영어는 당연히 어렵지 않다. 상대방 회사 방문도 손짓 발짓 의사소통을 하면 되고 필요하면 통역을 구해도 된다. 국제회의도 세부 어젠다를 미리 입수하므로 꾸역꾸역 준비하면 미리 대비할 수 있다. 국제 콘퍼런스만큼은 다수의 청중 앞에서 무대에 오른다. 어렵게 준비한 발표가 끝나고 나면 질의응답 세션이 있다. 첩첩산중이다.


내가 평소에 추천하는 동영상이 있다. "가이 가와사키(Guy Kawasaki)의 10-20-30 Rule"이다. 잘 안 들리면 자막을 켜고 보자. 요지는 이렇다. 발표할 때에는 슬라이드를 10장 이내로 만들고, 20분 내로 끝내며 폰트는 30으로 하라는 것이다.

유투브에 있는 그의 다른 영상도 추천

그렇다면 우리 한국인들(또는 아시안들)의 국제 콘퍼런스 발표 준비는 어떨까?


먼저,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는 부하직원들이 만들어준다. 보통 해당 부서에서 국문으로 초안을 만들면 이를 영어로 변환한다. 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글씨는 깨알같이 쓴다. 슬라이드를 보고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고 읽을 영문 스크립트 또한 따로 준비한다. 주로 상사가 발표하게 될 텐데, 상사는 무대에 올라 영문 스크립트를 보고 읽는다. 바쁘다는 핑계로 연습도 거의 안 하며 때운다는 심정으로 읽어버린다. 양이 많으니 발표시간은 주최 측의 요청 시간을 오버하게 된다. 일부러 질질 끄는 이유도 있다. 그래야 지쳐버린 청중으로부터 질의응답이 안 들어올 테니까 말이다.

몇 해 전 일본에 갔을 때 발표자료 중의 하나. 못 읽게 하려고 일부러 저런 것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청중의 관점에서 피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가 하는 것처럼 깨알같이 적힌 슬라이드를 띄우고 보고 읽는 것이다. 그리고 양도 많아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런 발표다.


가와사키도 바로 이 지점을 지적한다.


Your audience will quickly figure out this bozo(멍청이) is reading his slides. I can read faster than this bozo can speak.


대만의 왕 사장은 사교성이 남다르고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국제 콘퍼런스에서 발표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와 대화를 해보면 중국인 특유의 악센트가 있는 영어를 써서 뭐라고 하는지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늘 자신 있게 말을 건넸으며 웃음이 많았다. 그는 발표 준비에 신경을 많이 쓰는 듯했다. 그냥 보고 읽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날도 왕 사장의 발표가 끝나자 박수가 이어졌다. 질의응답 시간이다. 콘퍼런스 사회자가 마이크를 플로어로 돌렸다. 청중 중 몇이 손을 들고 이런저런 질문을 한다. 쉽지 않은 질문인데도, 왕 사장이 막힘없이 술술 대답하는 게 신기했다. 그의 영어를 여전히 다 알아들을 수 없긴 하지만 유창한 질의응답은 인상적이었다.


어느 날 나는 왕 사장의 비결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출장을 다니면 친해지는 외국 동료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대만이었다. 그날 대만 직원이 나에게 스윽 오더니 작은 쪽지를 은밀히 내밀었다.


Steve, do me a favor. Please raise your hand and ask this question to Mr. Wang when the q&a session begins.

질의응답이 시작되자, 나는 손을 번쩍 들었고, 왕 사장은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심각한 얼굴이었으나 이내 웃음을 지어 보였다. "Steve, It’s a good question!"이라는 여유를 부리며 말이다. 그의 답변은 역시나 유창했다.


상사가 어느 날 갑자기 발표의 달인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던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즉, 써준 대로 보고 읽는 수밖에 없다. 말했지만 국제 콘퍼런스에서는 발표가 끝나면 어김없이 질의응답 세션이 있다. 상사에게는 공포이다. 무슨 질문이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질문이 뭔지 알아듣는 것도 쉽지 않지만, 즉석에서 대답하는 것도 순발력과 실력이 필요하다. 동문서답도 유분수지 슬라이드를 다시 보고 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까딱하다간 질문은 들어왔는데, 적막만이 흐를 수 있다.


이제 당신의 미친 섭외력이 빛을 발할 때다. 아는 사람에게 질문을 적은 쪽지를 건네보자. 나중에 봤더니 대만 직원은 최대 3명을 섭외했다. '진짜 질문이 들어오는 돌발 사태'가 생기면 안 되기 때문이다.


당신의 상사를 제2의 왕사장님으로 만들어보자.


만약 당신이 발표를 해야 한다면, 가와사키의 10-20-30의 원칙을 유념하면서 준비해보자. 핸드폰으로 셀프 녹화를 하면서 여러 번 연습해보는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 나의 시선처리, 불필요한 몸의 움직임, 구부정한 자세, 자신 없어 보이는 태도 등 많은 것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가 총체적인 영어 능력이겠지만, 우리 한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어려워하는 분야가 스피킹 아닌가 싶다. 출장 시에는 나 자신도 내 스피킹 실력에 씁쓸한 때가 많았다. 우리는 커피 브레이크 때 소셜하는 정도의 스피킹을 넘어 업무로 이어지는 스피킹 실력이 필요하다. 네이버에 들어가면 뜨는 수많은 영어회화 광고들은 도움이 안 된다. 일주일 만에 입이 트인다고?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영어실력이 "아 임 파인 쎙큐 앤드 유?"는 아니지 않은가?


내 이야기를 잠시 하겠다. 나는 미국인들이 변호사가 되고자 입학하는 법학전문대학원에 갔는데, 졸업시험 중의 하나가 trial technique이었다. 원고나 피고의 소송 대리인이 되어 모의재판을 이끌어가는 시험이다. 대학교 근처의 고등학생들이 그날 스쿨버스를 타고 와서 배심원으로 앉아있고, 그 친구들 앞에서, 구두변론을 하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배심원의 유무죄 평결이 달라진다. 말발 좋은 미국 친구들이 로스쿨에 널렸는데, 내가 상대나 되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연습 또 연습이었다. 국제회의에서도 발표하면서 내가 매달린 방법 또한 셀프 녹화였다. 여전히 필자는 내 영어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당신도 한국어-영어의 전환이 편한 바이 링구얼이 아닌 이상 영원한 숙제다. 뻔한 얘기지만 평소의 노력이 중요하다. 스스로 영어에 노출시키고 입을 열어야 한다. 화상영어 앱도 좋고, 일대일 스피킹 학원도 좋다. 스피킹은 어느 순간 방언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지난한 노력으로 쌓아 올려야 하는 숙명과도 같은 과제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현지어에 대한 관심을 부탁하고 싶다. 영어가 안 통하는 곳이 제법 많다. 제2외국어 국가로 출장을 가는 경우 간단한 회화집이라도 빌려서 몇 마디 연습해 보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출장 준비로 바쁜데 이런 것까지도 해야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거창한 게 아니다. 식당에서 주문할 때, 한국사람이라고 얘기할 때, 깎아 달라고 할 때 등등 매우 유용한 상황이 많으며, 문장이 아니라 단어 수준의 언어만 구사해도 상대방의 호감이 증폭된다.


Tip: 상사가 발표하게 되면 왕 사장의 사례를 참고해보자. 내 경험상 대륙별로 각양각색의 영어 악센트가 있는 지라, 질문을 알아듣기가 쉽지 않으니 회의장 내에 적막이 흐를 수 있다. 질문해 줄 사람 1명만 확보해도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발표를 해야 한다면, 가와사키의 10-20-30의 원칙을 유념하면서 휴대폰으로 녹화해가며 연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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