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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뷴 Nov 12. 2022

신은 고난의 순간에도 왜 침묵하는가

소설 "침묵"과 영화 "사일런스" 그리고 영화 "탄생"


하느님, 고난의 순간에 당신은 왜 침묵하십니까?


엔도 슈샤쿠의 오래된 소설 "침묵"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동명으로 영화화했다. 우리나라에는 "사일런스"라는 제목으로 2017년 개봉했다. 지금은 유투브나 웨이브 등에 들어가면 볼 수 있다. 2000원도 안 되는 금액에 렌탈이 가능하다. 3시간 조금 못 미치는 긴 영화이지만, 내내 흡입력이 있다. 바닷가 풍경이 자주 나오는 데, 처연하면서도 아름답다. 배경은 1600년대 중반 일본의 나가사키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마주를 바친 노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20년을 준비해 만든 영화다.

주인공 앤드류 가필드가 분한 로드리게스 신부다. 눈에 익은 얼굴이라고? 맞다. 그 스파이더맨이다.

지난번 내 브런치에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 전기에 대한 감상과 11월 30일에 개봉될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탄생"을 소개한 바 있다. 집 근처 남한산성 순교성지를 방문하고 미사를 드리며 묵상하는 것이지만, 순교는 생각할수록 먹먹한 것이다. 오직 하느님에 대한 믿음 하나로 내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것 아닌가? 영화 사일런스에는 믿음과 순교에 대한 전혀 새로운 시각이 담겨 있다. 영화 "탄생"의 개봉에 즈음하여 감상해 봄 직하다.

오리지널 영화 포스터. 리암 니슨이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로 나온다.


우리나라에도 1801년 신유박해가 있었지만, 때는 이보다 한참 먼저 있었던 일본 막부 시절의 천주교 박해이다. 박해 중에서도 막바지 무렵인 1600년대 중반이다. 포르투갈 예수회의 페레이라 신부는 일본에 파견을 간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 그에 대한 서신이 도착한다. 그가 배교했다는 것이다. 순교가 아니고 배교라고? 젊은 두 신부(로드리게스와 가루페)는 누구보다도 신심이 깊었던 스승의 배교를 믿을 수 없다. 그들은 순교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일본에 간다.


일본에서는 영주 이노우에(실존 인물이다)의 지시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이노우에는 스스로 한때 천주교인이었기 때문에 육체적인 고문과 더불어 정신적인 박해에 능한 인물이었다. '기리시탄(크리스천의 일본식 발음)'임이 밝혀지면, 파도치는 바닷속에 십자가를 세우고 본보기로 매달아 놓아 사람들이 보게 한다. 매달린 이들은 밀물이 닥치면 머릿속까지 파도에 잠기고, 썰물 때 정신을 차리기를 반복하다가 며칠 안에 죽고 만다. 산채로 불구덩이에 던지는 것도 예사다. 귀 밑에 상처를 작게 내서 피가 한 방울씩 흐르게 하고 거꾸로 매달기도 한다. 그러면 죽지는 않으면서도 떨어지는 핏방울을 느끼며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 영리하면서도 간교한 이노우에의 회유에 못 이겨 많은 이들이 배교를 하고 있었다. 목적은 하나다. 예수의 얼굴이 새겨진 판을 발로 밟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천주교 신자가 아님을 선언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외국인 신부들의 배교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점을 이노우에는 알고 있었기에 집요하게 이를 실행한다.


일본에 도착한 두 신부 역시 결국 잡혀서 배교를 강요받게 되는 데, 주인공 로드리게스 신부는 저항을 거듭하다가 옛 스승 페레이라 신부를 만난다. 그는 배교 후 "시와노 추안"이라는 일본 이름을 받고, 일본인 여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대혼란에 빠지게 되고 나 역시 이 장면에서 한 대 맞은 것처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해 속에서 순교라는 꽃을 피운 신부들의 사연들만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레이라 신부는 고통 속에 거꾸로 매달려 신음하는 일본인 신자들을 너의 신념 때문에 죽게 놔둘 거냐며,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배교를 권유한다. 무고한 일본인들의 죽음을 견디지 못한 로드리게스 신부는 마침내 배교에 동참하게 된다.


신부는 발을 올렸다. 발에 둔중한 아픔을 느꼈다. 그것은 형식이 아니었다. 자기는 지금 생애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온 것,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온 것, 인간의 가장 높은 이상과 꿈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이때 밟아도 좋다고 목판 속의 그분은 신부를 향해 말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다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먼 곳에서 울었다. -소설 "침묵" 중


이 배교 장면은 영화에서 천천히 그리고 차츰 확대되어 밀도있게 그려진다. 탄식과 눈물이 절로 나왔다.  배교의 순간이 너무나 인간적으로 느껴지고 위안을 주는 모순적인 순간이다. 침묵하고 마는 신에 대한 원망, 배교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나약한 인간의 본질 등이 강력한 내러티브로 다가온다.




얼마 전 150명이 넘는 젊은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의 참사를 접하며 나 역시 가슴이 아팠다.


미국에 잠시 살아본 우리 가족은 안다. 핼러윈은 그저 놀이이고 축제이다. 우리도 그랬다. 그날 딸은 마녀 분장을 하고, 아들은 스파이더 맨 옷을 입었다.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집집마다 초인종을 누르며 "trick or treat"을 외쳤다. "사탕 안주면 골탕 먹을 줄 알아요!" 하는 것이다. 성인들도 평소에는 입을 수 없는 독특한 복장을 차려입고 만나서 시시껄렁하게 웃고 떠들며 그날 하루를 재밌게 보낸다. 스파이더맨으로 분장한 배 나온 아저씨가 스파이더맨 옷을 입은 우리 아들에게 사탕을 주는 사진이 재밌어 지금도 가끔 꺼내본다.


그날 이태원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재밌게 놀고자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세월호 참사도 그렇지만 대형 참사 소식을 접할 때마다 갑자기 닥친 희생자들의 고통에 그리고 신의 침묵에 나 역시 아프고 혼란스럽다.


그러나 소설과 영화 "침묵"을 통해 위로받는다. 신이 침묵 속에서도 인간에게 말을 걸고 있고, 자신을 부정하고 배교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끝내 사랑으로 용서하고 받아준다는 대목을 공감한다. 시인 정호승도 영화 침묵을 보고 아래와 같은 감상을 남겼다.


신은 증오의 대상이 되어 줄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 존재였다. 고통 가운데에서 증오의 완벽한 대상조차 없었다면 내 삶이 그 얼마나 참담하고 황량했을 것인가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깨달음의 눈물이 났다-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후 작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내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표면적 부재 속에서 하느님의 평화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고난 가운데에서의 평화이고 십자가 위에서의 평화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우리가 흔히 느끼는 지상적이고 감정적인 평화 혹은 타협의 결과로써의 평화가 아니다. 내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거나 마음의 곳간이 넉넉하면 누구라도 지상의 평화를 누리고 나눌 것이다.


그러나 "침묵"에서처럼 현실에서는 힘들고 열악한 상황이 무지막지하게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닥쳐온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이때에 고통 속에서의 평화를 찾는다고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평화가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정호승의 시 "침묵"으로 마무리하며...


침묵 / 정호승


종소리는 종의 침묵이다

새소리는 새의 침묵이다

대숲에 이는 바람 소리는 바람의 침묵이다

산사의 풍경 소리는 진리의 침묵이다

여름날 천둥소리는 거룩한 하늘의 침묵이다

별들이 가장 빛날 때는 바로 침묵할 때이다

꽃들이 가장 아름다울 때도 바로 침묵할 때이다

내가 통영에서 배를 타고 찾아간

인간의 섬은 다 바다의 침묵이다

오늘도 눈물의 마지막 열차를 타고 신새벽에 서울역에 내렸을 때

노숙자의 어깨 위에 고요히 내리는 함박눈은

희망의 침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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