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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뷴 Feb 07. 2023

전공 불문과 문해력

대학생들의 졸업 시즌이 다가온다. 입사 지원요강에 흔히 들어가는 한마디가 있다. "전공 불문"


"입사 절차가 공정해야지, 불문과 출신들만 우대하면 안되는거 아냐?"

이런 불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굳이 설명한다. "전공 불문"의 의미는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했는지는 상관없이 인재를 선발한다는 것이겠다. 설마 그것도 모르겠냐고?


"정말 이지적이시군요"

"아니, 제가 easy 하다고요? 무례하시군요"

'심심한 사과'에 이은 또 다른 문해력 해프닝이라고 한다.


나는 이 "전공 불문"의 불어불문학과를 나왔다. 내 대학시절의 문해력 분투기를 생각해 본다.


나는 불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대학을 들어왔다.(왜인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해두자.) 한번은 프랑스의 유명 철학자이자 작가인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라는 원서를 한 학기 내내 읽었다. 강의 시간은 고역이었다. 모르는 단어가 나왔을 때 펼쳐야 하는 게 사전 아닌가? 그런데 나에게는 모두가 모르는 단어였다. 한 학기가 끝날 때쯤 강의 텍스트는 내가 원문 밑에 써넣은 컬러 주석으로 빈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강의명 자체로 포스가 느껴지는 "중세불어" 시간은 또 어떤가? 중세의 불어는 지금의 현대불어와는 그냥 다른 말이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 서로 사맞디 아니할새"의 불어버전을 공부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프랑스에서 사전학을 13년간 공부하고 막 귀국하셨다는 신임 교수님은 강의에 열정이 넘쳤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걸 왜 공부하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존경하는 고 황현산 교수님(에세이 책 '밤이 선생이다'로 유명)은 프랑스 시를 가르치셨다. 끄적여놓은 노트의 내용을 보면 그대로 엮어도 책이 될 만큼 주옥같은 말씀들이었다. 황교수님은 다음 수업 때 다룰 시를 학생들이 한 장짜리 노트에 감상을 적어 발표하게 하셨다. 내 것을 포함해 내밀기 민망하거나 싱거운 분석도 많았으나, 놀라운 수준의 것도 간혹 나왔다. 아무리 명강의라도 해가 잘 드는 2층 강의실 창가에 앉아있으면 왜 그렇게 졸렸는지. 황교수님의 예의 낮고 조용조용한 말씀이 자장가처럼 들려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고달픈 청춘이었다. 그래도 졸업이 다가올 때 쯤 나의 실력은 꾸역꾸역 늘었던 것 같다. A만 찍힌 성적표도 처음 받아봤으니 말이다. 물론 이런 요행은 또 일어나지는 않았다.

책읽기 싫어하는 중딩 아들이 가장 많이 공감할 것 같다.


프랑스에서 목사로 활동하는 대학 동기가 있다. 목사? 말했잖은가. "전공 불문"이다. 이 친구가 단톡방에 프랑스 대입 시험 문제, 그중에서도 철학시험 문제를 올린 적이 있다.


어떤지 한번 보자.


<일반 인문계>


Les pratiques artistiques transforment-elles le monde?

(예술적 실천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Revient-il à l’État de décider de ce qui est juste?

(무엇이 바른 지/공정한 지를 결정하는 것은 국가의 몫인가?)


<이공계>


La liberté consiste-t-elle à n’obéir à personne?

(자유는 아무에게도 순종하지 않는 것으로 성립되는가?)


Est-il juste de défendre ses droits par tous les moyens?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 권리를 지켜내는 것은 옳은가?)


과연 우리들은 어떤 수준의 답안지를 써낼 수 있을까? 독서량이 충분치 않고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면 써낼 수 없다. 문학과 철학에 있어 지성들이 넘치는 프랑스다. 프랑스에서는 저런 시험을 도대체 뭐 하러 보는 것이냐는 "쓸모"의 관점에서 보면 곤란하다.




문해력, 말 그대로 문자를 해독하는 능력은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쓸 줄 안다는 것이다. 단어와 문장은 세상을 보는 창과도 같다. 많이 그리고 정확히 알수록 내 창의 크기는 커지고 세상을 보는 내 눈은 밝아진다.


구체적으로, 어휘가 늘어가면서 문맥 또는 상황을 읽어내는 힘이 늘게 된다. 이것은 왜 중요하냐면, 우리는 일단 혼자 살 수 없고, 사회라는 공간에서 어울려 살 수밖에 없다. 공동체에서는 서로에 대한 커뮤니케이션과 이해가 중요하다. 문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서로가 그 안에서 자신의 뜻을 정확히 이해시키거나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의 MZ 문해력 논란도 바로 이 점에서 서로가 간극이 있었고 오해한 탓이다.  


문해력은 돈하고도 직결된다. 문해력이 떨어지면 심각하게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나는 법률을 공부해서, 누구보다도 계약서 안의 단어들 하나하나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고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약 당사자 중 어느 한쪽만 계약의 내용을 모르는 경우 미안하지만 우리는 모르는 이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문해력이 높아진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각자의 상상력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문해력은 이 지점이 가장 중요하다. 문학은 법학이나 의학과 같은 실용학문과는 달리 과거에 대하여 진지하게 탐구해 왔으며 새롭게 올 어떤 것들에 대하여 늘 미리 이야기를 해 왔다. 그 발현 형태는 다양하다. 소설, 시, 시나리오, 애니메이션, 웹툰 등 말이다.


"오징어 게임"은 황동혁 감독이 상상으로 그려낸 세계가 문자화되어 시나리오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뮤지컬로 알고 있는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카메론 매킨토시라는 걸출한 기획자가 재탄생 시킨 것이다. 나도 즐겨보는 웹툰이 있고, 내 아이들도 요즘 틈만 나면 웹툰을 들여다본다. 웹툰도 저자들의 상상력 그리고 단어와 문장이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


누구나 소비의 주체가 될 수는 있으나, 아무나 생산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어린아이가 쓰는 말로 오징어 게임과 레 미제라블이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소비만 하더라도 문해력이 뒷받침되면 더욱 재밌게 즐길 수 있다. 문해력과 상상력이 중요한 지점이다.


언뜻 쓸모가 없어 보였던 그때 그 불문과 강의실의 힘은 여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생한 증거가 있다. 넷플릭스 킹덤 시즌 2의 박인제 감독은 내 1년 선배다. 그는 졸업앨범에서 내 옆에 앉아 있다. 연락하는 사이도 아닌데 괜히 뿌듯하다. 우리가 킹덤의 다음 시즌을 애타게 기다리게 하는 데는 박 감독의 힘이 크다. 그가 강의실에 앉아 현타를 느꼈든, 졸다가 다시 교수님 말씀에 귀를 쫑긋했든, 그 시간들이 지금의 박감독을 만드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수업시간에 프랑스 대입시험 문제를 풀지는 않았으나 답안지를 써낼 정도의 힘은 길렀던 것 같다. 불어로 된 텍스트를 접하며 비슷한 고민을 했고, 나의 후배들 역시 여전히 그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생각하는 힘을 남다르게 키워왔고 우리와 같은 "전공 불문"들이 모여 이 세상을 좀 더 다채롭고 풍요롭게 한다고 믿는다. 다가올 미래가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뿐이 아니며 또 그래서만도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해력 #전공불문 #불어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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