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국에 삽니다.
오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택시를 탔다. 택시에 올라탄 지 얼마 되지 않아 안경을 쓴 중년의 기사가 우리에게 공책 한 권을 건넸다. 수정은 순간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줄로 생각했다. 하지만 재빨리 기사가 설명하길, 자신의 승객들이 글을 남긴 공책이라고 했다. 내가 무언가를 쓸 동안 수정은 가장 오래되어 보이는 공책을 하나 읽었다. 가장 처음 글은 2010년에 쓴 것이었다. 여의도까지는 15분이 걸렸다. 그 시간 내내 공책을 읽던 수정이 (보통은 멀미 때문에 아무것도 읽지 않는다) 눈시울을 붉혔다. 몇 개의 글을 읽었는데 거기에는 바람에 관한 짧은 시도 한 편 포함되어 있었다. 기사가 직접 쓴 것이었다. 명료하면서도 아름답지만 지나치게 감성적이지는 않은 시라고 했다. 하지만 가장 놀라웠던 점은 글 대부분이 마음속으로부터의 고백을 담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치 이들 모두가 맺힌 감정들을 터놓기 위해 이 택시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혼자다. 아내는 거의 집에 없다. 아들은 나를 미워한다." "병원에서 나오는 길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 번째 만나러 가는 길이다. 너무도 설렌다. 지금까지 만난 여자 중 가장 멋진 여자다." "어머니가 오늘 돌아가셨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삶일 것이다. 삶의 순수한 상태. 나도 따라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책 "한국에 삽니다" 중에서
생각해보면 나는 택시 타는 게 즐거운 경험이었던 적은 별로 없다. 나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싶은데, 기사는 마이웨이다. 듣고 싶지 않은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기도 하고, 트로트를 흥얼거리며 따라부르기도 한다. 자꾸 말을 거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혼자 욕도 한다. 담배를 막 폈는지 차에서 냄새가, 그것도 진하게 나는 경우도 있다. 목적지까지 가는 건 기사의 몫인데, 네비를 켜지도 않고 가는 길을 알려달라는 기사도 있다. 물론 반대로 기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만취한 승객이 하루가 멀다하고 생기는 것도 안다. 엄벌에 처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사라져버린 "타다"가 그립다. 기사와 나 사이의 공간과 밀도가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그 타다 말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택시'의 기사를 만난다면? 잠시 당황스러울 것 같긴 하다. 그러나 궁금하다. 이 택시기사는 승객들에게 공책을 여전히 내밀고 있을까? 나라면 무엇을 끄적였을까?
"한국에 삽니다." 저자 안드레스 솔라노는 콜롬비아 출신이다. 지구의 반대편 콜롬비아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커피를 좋아하는 이는 마일드한 커피의 대명사인 수프리모가 생각날지 모르겠다. 아니면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소재로 한 넷플릭스의 "나르코스(Narcos)" 일지도. 기실 나 역시 나르코스를 보면서 실전 스페인어를 조금 익히긴 했다. 언젠가 콜롬비아에 가면 욕은 그럴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감정을 섞어서 말이다. 화면을 보며 혼자 연습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말할 기회는 없을 것 같다. 그 욕들이 '아...X발' 정도의 수준이 아닌 건 분명하다. 총구멍을 내 눈으로 볼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이 책은 스페인어로 현지에서 먼저 출간되었고, 상도 받았다. 저자의 한국인 아내가 번역을 했다. 저자는 동아일보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고 이를 통해 최근 그를 알게 되었다. 그의 시선은 깊고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하다. 책에서 한국의 "아줌마"에 대하여 묘사하는 부분이 그 예다.
아줌마는 절대 순종적이지 않다. 그들의 눈동자에서 천둥이 친다. 이들은 단순히 고집 센 주부가 아니다. 내가 보기엔 하나의 완전한 개념을 대변한다.
시적인 이 표현은 아줌마에 대한 다른 이들의 많은 설명 중에서도 군계일학이다. 핵심과 찰나를 다 잡았다.
그의 책을 전부 찾아서 읽어보고 있다. 총3권이 있다. 코로나 시기 동안 그의 시각으로 한국의 사정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열병의 나날들"을 읽었다. 다음 읽을 책은 "살라리오 미니모"다.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한 경험을 기록한 것이란다.
인스타그램에서 그와 난 맞팔 중이다. 서로 DM도 주고 받는다. 그의 인스타 명은 "술고래"다. 오프라인의 그가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