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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뷴 May 15. 2023

거리에서 만난 아이들

첫날이었다. 바람이 아직 매서운 밤, 천막 밖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내가 딱했나 보다. 사회복지사이자 직원분이 내 손을 잡아끌더니 여자아이 앞으로 데려간다. 바닷가 횟집에 가면 있을 법한 빨간 플라스틱 탁자와 의자 세트가 여러 개 있다. 앉아있던 혜경이는 고1이다. 고등학생치곤 짙은 화장을 하고 액세서리를 여기저기 걸치고 있었다. 통통하고 동그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눈빛은 경계심이 많아 보였다. 틈날 때마다 좌우를 살핀다. 


"변호사 시래"

직원분이 나를 변호사라고 소개한다. (봉사자 서류에 자격증 쓰는 칸이 있는 데 그걸 봤나보다.) 혜경이의 눈이 순간 반짝인다. 


"어이쿠, 변호사는 변호산데, 미국에서 변호사가 됐어요. 그래서 법률상담 그런 건 못해줘요. (그럴만한 지식도 없다.) 하지만 인생 선배로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얼마든지요." 


갑자기 혜경이의 말이 많아진다. 전 남자 친구 이야기를 꺼낸다. 일 년 전 나이차가 제법 있는 오빠를 사귀었다가 헤어졌다. 그런데 그는 수시로 사진과 동영상을 공개하겠다며 협박한다. '안 만나주면 죽어버릴 거다. 너네 학교를 찾아오겠다.'고도 톡을 보낸다. 혜경이는 전 남자 친구가 너무나도 무섭다.


부모님하고는 갈등이 많다. 아빠는 가정 폭력이 심하다. 술만 먹으면 엄마와 자기를 때린다. 견디다 못해 경찰에 신고했다. 혜경이는 엄마하고도 수시로 다툰다. 어느 날은 다투는 와중에 몸싸움이 벌어졌는데, 엄마는 딸이 자기에게 욕을 하고 때렸다며 이럴 수가 있냐고 경찰서에서 큰소리를 쳤다. 부모님과는 화해하고 싶고, 좋은 딸이 되고 싶다. 하지만 폭력은 감당하기 버거운 수준에 와버렸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첫날부터 어렵다. 


"아지트"라는 게 있다. "이들을 켜주는 럭"의 줄임말이다. 성남 신흥역에 매주 목요일 저녁에 온다. 야탑역과 광주 경안동에도 간다. 매주 3군데를 들르는 것이다. 배고픈 노숙자들에게 밥을 주는 "안나의 집" 사회복지법인에서 펼치는 위기 청소년 돌봄 사업이다. 신흥역 근처 대로변에 천막을 치고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다 놓는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빵이나 핫바도 있고, 음료수도 있다. 추억의 전자 오락실 게임기도 있고, 보드게임들도 있다. 목요일 하교시간이 지나면 아이들이 많이 지나간다. 놀다 가라는 자연스러운 홍보에 아이들이 제법 들렀다 간다. 아지트는 밤 11시까지 운영한다. 


나는 얼마 전부터 봉사자로서 퇴근 후 동참하고 있다. 그래서 목요일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면 약속을 잡지 않는다. 존경하는 빈첸초 보르도 김하종 신부님이 나에게 권유해서 시작했다. 날이 아직 추운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고백컨데 처음 가보고는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아이들하고 내가 나이차가 너무나 많이 나서 대화가 잘 될 것 같지 않았다. 생면부지의 모르는 아이들에게 말을 걸고, 가까워지는 것도 어색했다. 날씨도 변화무쌍한데 밖에 오래 서 있거나 작은 테이블에 앉아 아이들하고 이야기 나누는 게 솔직히 피곤했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 리클라이너에 앉아 넷플릭스를 보는 게 몸도 마음도 편하긴 하다.


아이들 만난 이야기를 더 풀어본다. 


세 번째 날이었던 것 같다. 호승, 동규, 득현은 같은 반 친구다. 고1이다. 근처 정보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우리집 중3 아들이 요즘 무슨 생각인지 궁금하던 차였다. 친구들이 공부를 잘한다고 추켜세우는 호승이는 도라에몽을 닮았다. 먹는 걸 좋아하는지 배가 좀 나왔다. 수줍은 듯 웃는 얼굴이 아들 녀석 하고 비슷해 보인다. 동규는 말하는 게 똘똘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검정색 작은 귀걸이를 하고 있는데, 꽤 잘 어울린다. 득현이는 평범한 외모다. 호리호리한데 셋 중에 키가 가장 크다. 이 아이들 생각보다 어른스럽다. 호승이는 굿즈 만들어서 파는 일을 하고 싶단다. 인스타에서 인기 만점인 굿즈를 만들고 마케팅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빨리 배우고 싶단다. 


동규는 진로를 아직 못 정했는데. 한 가지는 확실하다고 말한다. 


"실패를 많이 해봐야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하여튼 실패해 보려고요."


득현이는 여자친구를 만나러 서둘러 가봐야 하는 듯했다. 대화에 별 관심이 없다. 간식으로 나오는 빵과 음료수가 더 좋은 눈치였다. 




봉사한 지 석달째다. 생각보다 힘들어서 오늘까지만 하는 걸로 얘기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나갔다. 


오늘 만난 정민이는 몸집이 왜소하다. 남자아이인데 키도 작고, 엄청 말랐다. 50킬로그램도 안될 것 같다. 첫눈에는 고등학생인 줄 알았다. 21살이란다. 신검을 받았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군대를 안 간단다. 중국국적이다. 부모님을 따라 8년 전에 한국에 왔다. 그런데 친구가 한 명도 없다. 만들고 싶지도 않단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드라마 "글로리"가, 정신순 변호사 아들의 "학폭 사건"이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스쳐 지나간다. 내가 간식빵 줄까요? 했더니 괜찮단다. 


"아니, 학생이 빵을 하나 먹어줘야 나도 하나 까먹지." 


너스레를 떨었더니, 그럼 하나 먹겠다고 한다. 정민이는 단팥빵, 나는 크림빵이다. 역시 먹을 걸 나눠 먹으면 온기가 퍼진다. 정민이 말수가 조금씩 늘어간다. 30분 넘게 이야기 한 것 같다. 정민이가 일어나야 하는 눈치다. 돌아서면서 의외의 한마디를 건넨다. 


"아저씨, 다음 주에도 여기 나와요?"


"으응? 아... 그게..." 


차마,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내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나올 거야. 잊지 말고 들러요. 내가 있을 테니까." 


정민이는 카카오바이크를 타고 집 쪽으로 향했다. 나는 손을 번쩍 들어 잘 보이게 흔들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는 정민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를 알아보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 페달을 힘차게 밟는다. 


오늘 김하종 신부님이 현장에 나와서 한참을 머물다 가셨다. 내가 도망갈 줄 예감하셨나 보다. 나하고도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목요일 마다 거리에서 만나는 아이들. 모자에서 갑자기 흰 비둘기가 튀어나오는 마술처럼 아이들과의 만남은 매번 새로우면서도 경이롭다. 


봉사는... 아무래도 좀 더 해야겠다. 




*아이들 이름은 다 가명이다. 픽션도 중간중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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