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녜스 Feb 17. 2020

존재감 없던 겨울이

어제 내린 잔설이 후드득 가느다랗게 파편처럼 날리며 잠에서 깨어난 듯 흐트러진다.

가려던 겨울이 뒷자락에 붙들려 솜털 같은 눈발을 뿌리고 도시를 하얗게 변신시켜 버렸다.

겨울도 존재감 없이 비치는 게 싫었던 게다.

잿빛 하늘에서 폴폴 나풀거리며 내리는 하얀 눈송이들 사이로

풍경이 살아서 눈짓을 보낸다.    

나까지 덩달아 풍경 속으로 빨려간다.


겨울의 쓸쓸함마저 덮어버리는 새하얀 눈은 자동판매기처럼 지나간 시절을 작동시킨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덮인 땅 위에 첫 발자국을 남기며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했던 웃음소리가 그립다.

눈이 내리는 날은 기뻐 날뛰는 강아지처럼 친구들과 함께 눈을 맞으며 거리를 활보하고, 클래식이 흐르는 음악다방에 앉아 차를 마셔줘야 예의일 것 같았다.

기쁨도, 낭만도, 풍경도 머릿속에 남은 기억의 단편에 불과하지만 눈에 대한 추억은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다.  

그 추억 속에는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만든 눈사람이 행여 녹아버릴까 가슴 졸였던 동심도 있다. 유년시절에는 대궐 같은 집이었지만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여 있던 좁은 골목길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열을 올리던 썰매 타기며 눈싸움도, 처마 끝 일렬로 늘어선 수정 같이 맑은 고드름을 따다가 입안이 얼얼해질 때까지 베어 물고 놀았던 철없던 시절의 즐거움도 함께 한다.

그 시절의 겨울이 진정 겨울의 참맛을 느끼고 누렸던 시절이었던  같다.

시간 속에 기억마저 차츰 낡아가겠지만 그리움은 묻어나는 거라고 했던가?

순백의 아름다움을 지닌 하얀 눈을 바라볼 때마다 순수한  마음이 되고 소박하고 따뜻한 시선이 머문다.

눈이 오면 생활의 불편함을 먼저 떠올리고, 차가 막히고 도로가 지저분해져서 달갑지 않다는 말을 들을 때면 묘하게 서먹해지고 각박한 마음이 드는 건 이 때문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안될 이유가 없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