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식물은 없다. 고무나무에게도 목소리가 있어서, 그것은 때때로 나의 잠을 방해한다. 아우성도 투덜거림도 아닌 그 목소리. 물을 줘. 햇빛 가까이로 데려다줘. 먼지를 닦아줘. 잎사귀 끝을 매만져줘. 이목구비가 없는 것조차 욕구가 선명하다. 나는 그 부탁을 다 들어주지 못한다. 완성되지 못할 시를 쓰느라, 밥을 먹느라, 그냥 누워 있느라, 누워서 책을 보느라. 고무나무는 나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물을 주는 것만으로 주인 행세를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네가 죽는다면 맘이 아플 것이다. 한동안은.
2023, 이라고 쓸 때 아직도 엄습해 오는 생경함은 어찌할 수 없다. 살아온 날들의 무게를 떠올린다. 어느 해는 이유 없이 가벼웠고 어느 해는 유독 무거웠다. 올해의 무게는 어떠한가. 아직 절반도 지나지 않아 가늠하기 어렵지만, 꽤, 그러나 견딜 수 있을 만큼 무거울 것 같다. 늘 그렇듯 선택의 순간에 망설일 테고, 망설이는 내가 싫을 테고, 그 싫음마저 이제는 친근하게 느껴질 테다.
글을 쓰고 싶지 않을 때 글을 쓰는 방법을 알고 싶다. 그럴 때는 도저히 첫 문장을 시작할 수 없다. 내가 쓴 모든 단어가 후져 보인다(실제로 후진지는 논외로 두고). 브런치에 가끔 접속하면 글을 써보라는 알림이 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돈 준다고 하면 어떻게든 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글로 돈 버는 작가가 아니고 순전히 자아실현과 취미와 배출 욕구에 기대어 글을 쓰고 있으니, 이런 쓰기의 지난함은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징징대지 말자.
십 대 때는 먹는 것에 초연해지고 싶었다. 이십 대 때는 거절에 초연해지고 싶었다. 가까스로 두 번 살게 된 29살에 나는 만남에 초연해지고 싶다. 새로운 인연이든 익숙한 관계든. 누군가를 만나는 행위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앗아간다. 물론 교류하면서 얻는 에너지도 있다. 예상치 못했던 위로와 응원을 받기도 한다. 그럴 때 인류애를 느낀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실에서는 나가는 에너지가 더 크기 때문에 몸을 사리게 된다. 내가 받을 상처나 내가 줄지도 모르는 상처가 미리 두렵다. 상처가 쉬워지고 또 그 상처를 쉽게 말할 수 있는 시대라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날씨가 따뜻해졌다. 옷차림이 가벼워지니 외출도 덜 부담스럽다. 저녁을 먹고 30분 정도 산책하고 있다. 사람들이 걷거나 뛰거나 대화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가끔은 이 사람들 뒤로 너무 많은 삶이 쌓여 있는 것을 본다. 지나온 기억이나 아픔이나 계획이나 관계들. 행복과 미움들. 이렇게 많은 삶이 이렇게 좁은 곳에 가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종종 나를 압도한다. 식상한 말이지만, 정말로 우리는 저마다의 무게를 지고 살아간다. 눈에 보이지 않을지언정. 그렇게 생각하면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저 사람의 안녕을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