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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 Aug 29. 2024

일상의 감각 되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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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삶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지인들을 만날 때는 너무나 신나게, 일을 할 때도 즐겁게, 책을 읽을 때는 언제나 설렘이 있었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나의 삶의 궤적에 빼곡하게 쌓여갈 나의 에너지들이 후에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 기대하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많은 책을 읽으며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하고 감동의 눈물을 한 움큼 쏟아내기도 했으면서 정작 그 이야기들은 나와는 별개의 이야기로 치부했던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그래, 지금에서야 확실히 깨닫는다.

그 단순한 진리들을.

인간은 언제나 어리석고, 삶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걸.


일단 마음정비가 필요했다.

늘 바쁘게 살던 나였기에, 모든 일상이 멈추고 암을 없애기 위해서만 돌아가는 시간과 삶의 패턴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인들에게 나는 씩씩한 암환자가 되어서 일상을 살아갈 거라고 호언장담했었다.


하지만 어두운 밤 통증 때문에 잠에서 깨고 난 후,

뒤척거리면 옆에 누운 남편이 걱정할까 봐,

내가 잠들기 전까지 걱정돼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터로 나갈까 봐...

조용히 어둠 속에서 진통제 한알을 조심스레 삼키고, 어두운 공기 속을 가만히 응시하며 눈만 껌뻑이고 있을 때.

그때 세상 속엔 암과 나만 남아있는 느낌이다.

내가 초대한 적도 없는데 내 뱃속 어딘가에 주인인양 똬리를 틀고 앉아 나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은 참 반갑지 않은 존재...

혼자 암에게 말도 걸어보고... 이제는 그만 나가달라 회유도 해보고, 화도 내보고...

열심히 암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항암제들에게 응원도 해보다가.

문득 내 처지에 한숨이 새어 나온다.


언제 잠든 지도 모른 채 잠이 들었다 아침햇살에 눈을 뜨면, 또다시 삶의 희망과 용기가 샘솟는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의도적으로라도 주변에 불을 자꾸 켜는 습관이 생겼다.

어둠 속에서는 나약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긴긴밤을 지새고 나면 또다시 일상의 하루가 시작되고, 직장에 나가지는 않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렇게 좋아했던 책이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사람들은 늘 내게 물었다.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 어떻게 그렇게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냐고.

재밌었기 때문에. 즐거웠기 때문에 시간을 쪼개서라도 책을 읽었다.

그래 아이 셋을 키우면서 일을 했고, 작은 청소업체를 키워 다양한 품목을 아우르는 큰 규모의 청소업체를 운영했고, 이후 청소기술전문학원을 운영하며 고용노동부 인가를 따냈고, 울산점을 운영하며 올해는 부산점 오픈도 앞두고 있었다.

그사이에 늘 한 달에 10~15권의 책을 읽었고 재작년엔 책도 한 권 출간했었다.

육아와 일과 취미생활과 그 와중에 사람들도 열심히 만나며 그렇게 모든 걸 열심히 했던 나였다.

항상 시간이 많이 나면 아무것도 안 하고 파도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책만 읽고 싶다 노래했던 나인데...

지금 남아도는 시간에도 나는 책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생에 늘 함께 해 왔던 독서의 즐거움을 잊게 되어 버린 것일까.

눈앞의 현실의 무게가 너무 고단해서 책 속의 일들이 다 시시하게 여겨지고,

부질없이 느껴진 게 사실이다.


새로운 책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의 책은 어떨까 하며 김혼비작가님의 다정소감을 폈다.

도구적 유용성은 떨어질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잉여로우면서도 깔끔한 효용이 무척 반가울 존재.

잘 보이지 않고 잊히기 쉬운 작고 희미한 것들을 통에 담는 마음으로 오늘도 쓴다는, 혼비 작가님.

그런 ‘김솔통’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혼비작가님.

무덤덤하게 책을 읽어 내려가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암이 나의 삶을 지배하게 놔둬서는 안 되겠구나.

그것이 나에게서 앗아가려는 생명이든, 정신이든, 용기든, 유머감각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모든 것을 나는 꼭 지켜야 되겠구나.


빛나게 살고 싶었고, 늘 빛나려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초대받지 않은 이방인과 한집살이를 하게 되고.

신나게 삶을 즐기던 나는,

한순간에 뒷방늙은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다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데 항암치료를 시작함과 동시에

나는 먹고, 자고, 싸는 데에만 집중해야 되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잘 먹고 잘 자기만 해도 주변에서는 잘했다, 고맙다 한다.

그러기에 나는…

나는 아직 내려놓지 못한 꿈이 너무나도 찬란하다.

그 찬란함을 마주할 때마다 자주 울컥해진다.

그래서 종종 마주하고 있는 이 삶의 괴리를 조금씩 채워나가는 연습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운명을 부여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끝없이 엔진을 가동했던 내게 휴식기를 준거라 생각하고.

좋은 것을 더 좋게 생각하고, 싫은 것은 뒤돌아보지 않게, 감사한 것에 더욱 감사할 수 있게.

삶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바라보게 해주는 시간들이다.


다정소감을 다시 읽으며 순간순간 또 피식하며 웃기도 하고 즐겁게 책을 읽었다.

역시 언제나 다정하고 위트 넘치는 최애 작가님이시다.

그래, 내 삶은 이렇게 스펙터클하지만 책 속의 인물들의 삶 또한 내  삶만큼 새롭고 흥미로울 수 있다는 것.  

삶과 죽음 이외에도 삶에는 수없이 많은 명제들이 존재하고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도 넘쳐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예전처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늘 그랬듯이 나는 아마도 이번에 찾아온 나의 삶의  고난을 함께 해줄 최고의 친구를 책에서 찾아야겠다.

 그렇게 일상을, 진짜 일상처럼 살아갈 때  너무 뜨겁고 무섭기만 한 '죽음'이란 화두 앞에서 늘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한 인간이 아니라  혼비작가님이 말한  잘 보이지 않고 잊히기 쉬운 작고 희미한 것들을 통에 담는  마음으로 오늘도 쓴다'는 것처럼  작고 희미한 것들도 챙기고 감각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일상을  되찾고 싶다.  


암선고와 6개월이란 얘기를 들었을 때 집으로 돌아와 책장에 읽을 거라 꽂아뒀던 무수한 책들을 보며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라고 생각했던 그 생각을.

다시 ‘읽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생에 대한 애착이고, 일상의 나의 모습이기에.

난 그걸 다시 회복해야겠다.



나는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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