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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Jun 17. 2020

흔들리던 나의 유년시절에 바치는 책

<벌새>, 김보라 저

1. 읽게 된 계기

영화를 보고, 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인 정희진 작가님께서 쓰신 글이 수록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반드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재고가 잘 없어서 있는 서점에 찾아가서, 자리에 없는 책을 찾으려고 여러 직원께 질문한 뒤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한 책을 얼른 품에 넣었다. 같은 책을 찾던 분께 재고가 하나밖에 없는데 내가 가지고 있다는 말씀을 곧 드려야했다. 이 좋은 영화가, 상영관도 별로 없고, 심지어 책은 재고도 몇 없다니! 분노할 만한 일이다.



2. <벌새>를 보고/또 읽고

중학교 시절 내 삶은 퍽 빈약하고 음울했다. 나 외의 타인을 멀리하고 회의적인 태도로 사는 것이 성숙해지는 것이라고 믿었던 때였다. 나 자신을 사랑할 수가 없어서 가시를 잔뜩 세우고 있었다. 되도록 기억에서 지워내고 싶은 시절.

영화를 보면서, 또 책을 읽으면서 나의 유년시절을 파묻어놓았던 기억에서 조금씩 끌어올리고, 은희의 삶과 비교하게 되었다. 드라마나 미디어에서 나오는 소녀들과 내가 겪은 유년시절은 너무 달라서 나는 스스로를 인정하고, 나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에 조금 어려움을 겪어왔다. 왜, 나는 남들과 이렇게 달랐으며, 내 안의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 고민했다.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어른들의 방식과 불안정하고 지금보다도 미성숙했던 나를 떠올리게 되었다. 정말, 이 영화는 보는 것 자체로 '심리 치료'의 기능을 한다. 

은희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눈을 돌려 타인들을 바라볼 때, 세상과 드디어 마주하여 환기되는 마음과, 그리고 선생님의 따스한 편지.

오랫도록 잊혀지지 않을 따스한 영화를 봤다.



책 <벌새>에서 좋았던 몇 가지 포인트.

1) 나는 지극히 인물의 내면에 접속한다. 더 큰 숲, 그러니까 구조나 사회는 무시하기 일쑤다. 그런 점을 김원영 변호사님께서 짚어주셔서 좋았다. 사회구조적인 문제, 그리고 맥락의 관점에서 어떤 점이 정확히 문제인지 콕 찝어서 언어화시키는 그의 능력이 감탄스러웠다.

2) 책을 사게 된 큰 계기 중 하나인 정희진 작가님. 말해 무엇할까? 이 시대의 천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의 모든 문장을 끌어안고 싶다.

3) AB와의 대담집.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여성들의 이 연대란! 우리는 더 많이 연결되고, 서로 접속하고, 지지하여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세상은 변해야 하므로.

4) 책에 나온 김보라 감독님의 가족 이야기가 좋았다. 나도 고등학교 시절, 부모님과 많이 싸웠다. 치열하게 그들을 용서하고, 나 자신의 분노와 부조리했던 과거를 어떻게 풀어보려고 애썼다. 아직까지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영영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을 수 있어도, 나는 그 시간들에서 회복되어 살아가고 있다. 가끔은 지금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퍽 장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김보라 감독님, 그리고 은희의 여정을 더 응원하고 싶다.



3. 김보라 감독님

이 책이 특히나 소중한 것은 여러 여성들 각자의 시각과 관점으로 여성들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점이다. 나는 요즈음 더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그들의 삶과 태도에 대하여 알고 싶다. 그래서 김보라 감독님의 용기와 끈기에 더 감사하다.

책을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점은 자전적 이야기라는 것이다. 물론, 수차례 강조된 대로 영화는 허구일 것.



4. 인상깊은 구절

그러나 은희 시절의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상처는 회복되지 않을 것만 같았고, 내가 누구에게도 맞설 수 없을 정도로 약하게 느껴졌으며, 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곧 나 자신의 가치로 여겨져 작은 일들에도 쉽게 다쳤다. 그건 사소한 일들이 아니었다. p208


영지 선생님이 자기 자신이 싫었던 때가 아주 많았다고 말하는 순간, 은희는 진심 어린 공감을 받게 된다. 사람은 자신을 싫어할 수 있으며, 그건 단죄하거나 혐오할 일이 아니라고. 그건 그저 자연스러운 마음일 뿐이라고. 그리고 그래도 된다고. 진심 어린 공감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따져 묻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함께 느껴 주는 태도는 아픈 사람을 자신만의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한다. 마음은 단죄의 대상이 아니다. 비록 그늘지고 아픈 마음이더라도 그 마음을 박해할 필요도, 부정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되지 않는데 억지로 자신을 사랑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된다. p212


은희는 영지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가 자신을 좋아하기란 원래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과 버림받고, 상처를 입을 때 느껴지는 자기혐오를 들여다보는 법을 조금식 배운다.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지 않고도 자신을 받아들이는 법을 익혀 간다.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로 영지가 죽었음을 알게 된 후에는, 우울을 넘어서기 위해 깊은 애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애도는 사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이해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단절된 성수대교의 모습은 사회적으로는 이후 강남과 강북의 더 철저한 단절을 상징하는 것 같지만, 그 단면을 응시하고 애도했을 때야말로, 우리는 우울의 정서에 머물지 않게 될 것이다. p232


이제야 어린 시절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이 겪었을 스트레스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서인이 된 후에도 모든 걸 이해하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이 부모를 비난하기만 하는 감정의 늪에 빠져 부모의 좋은 점들을 발견하면서 얻을 수 있는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p285


<벌새>를 만드는 동안 나도 그렇게 느꼈다. '자, 영화를 만들기로 했으니 이제부터 무슨 얘기를 할지 생각해 볼까'하는 식은 아니었다. '내가 꼭 하고 싶은 거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걸 해내지 못하면 내가 미쳐버리고 말 거다'라는 방식에 더 가깝다. p292


AB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걸 듣게 되어 무척 기쁘다. 그런 것들은 '창작'이 불가능하다. 삶 자체가 최고의 스토리텔러다.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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