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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May 28. 2021

매뉴얼이 필요해


 어렸을 때 이 혼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필시 매뉴얼 같은 게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아직 내가 나이가 차지 않아서 모르고 있는 것 뿐이지, 무감한 얼굴로 살고 있는 저 어른들은 어떤 매뉴얼 따위를 모두 비밀스럽게 공유하고 있을 거라고. 그런데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길어졌다. 아무도 내 마음같지 않을 때, 나만 혼자 외계인인 것처럼 느껴질 때, 특히 열쇠를 깜빡해서 한없이 엄마아빠가 집에 오기만을 기다리는 그 황망한 순간에 늘 서툴고 어설픈 나에게 세상은 너무 벅차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늘 상상했던 것이 있다. 내 마음에 별 관심도 없는 어른들에게 지쳐서, 내가 길을 걷다가 넘어지거나, 갑자기 사고의 위험에 처했을 때, 몰래 나의 안위를 신경쓰다가 비로소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는 거다.(짜잔!) 그러면 그때부터 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나만을 위해 정해져있는 경로를 따라, 보다 수월하게 살게 되는 거지.




 더이상은 호그와트로부터 편지가 오거나, 부모님과 지나치가 빼닮아서 가능성이 희박했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거나,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옷장 뒷편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일을 이제는 기다리지도 바라지도 않게 되었다. 내게 쭉 비춰져있던 이 현실에 발을 단단히 붙인 채로,(그동안은 5cm 정도 떠있었던 것 같다) 정해진 길도 없고 매뉴얼은 커녕 하루하루 아무것도 알 수도 보장할 수도 없는 채로 살아가는 수밖에.

인생길을 뚜벅뚜벅 걸어나간다는 것은, 결국 자기만의 매뉴얼을 계속해서 고쳐쓰고 점검하고, 또는 5살 때 엉망으로 써내려간 구절을 고집하기도 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 매뉴얼에는 꼭 규칙이나 대응책 따위가 아니라, 내가 늘 우선시하는 가치나 사람이 적혀있을 수도 있다. 손을 댄지 너무 오래되어 먼지가 잔뜩 싸인 채, 이제는 너무 구식이 되어버린 옛날의 그 매뉴얼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때와 상황에 맞게 매번 바뀌는 매뉴얼을 들고 여기저기를 탐험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




 가끔 사는 게 이상하리만치 벅차다고 느껴질 때, 물 속에서 숨쉬는 것처럼 내가 할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질 때, 그럴 때 가장 길고 어두었던 터널을 지나온 시절 적어놓은 매뉴얼이 내게 붙잡을 수 있는 동아줄이 되듯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가지고 있는 각자의 매뉴얼이 도움이 될 때도 분명 있다. 아주 현명하고 미래를 모두 아는 자가 내게 매뉴얼을 전해주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가장 최선의 매뉴얼이 뭔지 판단할 능력이 내게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삶의 지평선을 최대한 넓히고, 크고 작은 언덕과 골짜기를 모두 넘어보며 직접 내게 필요한 매뉴얼을 적어내려가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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