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데는 다른 어떤 것보다, 심지어는 그 대상보다도 내 마음의 상태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삶은 내가 기대하고 준비하는 대로 펼쳐지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만나는 인연이 소중한 것일 테다.
그러니까, 사랑은 그 대상보다 앞서 찾아오는 지도 모른다. 이미 내 마음 문을 열고 자리잡은 감정이, 마침내 찾아올 사람을 다시 문 두드릴 때까지 잘 대접하고 있어야 한다. 곧 사랑에 빠질 것 같은 기분, 설레고 괜히 들뜨는 마음은 아무때나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랑하는 것도 결국 능력이라고 믿는다.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나, 성향에 따라서 어느 정도 정해져있는 그런 능력. 전자의 사랑은 강아지, 솜인형 등 대상과 그 성질과 무관한 애정이라고 하면, 후자의 사랑은 삶으로 얼마나 그 사랑을 물질화시키는가, 다르게 말하면 그래서 그의 삶에 행동으로써 어떻게 구현되는가와 관련있는 것 같다.
마음의 무게, 애정의 척도, 이런 것을 측정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그러나 가까운 사이에서, 또 점차 가까워지는 관계에서 흔히 그렇듯이 애정은 순도가 낮다.(또는 그런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무 자르듯 단순히 정의하고 다룰 수 있는 감정은, 세상에 없다. 그래서 더욱 어렵다. 마음의 주체조차도 존재를 모르거나 파악하지 못하는 감정들도 있으니까.
어렸을 때 사랑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두 사람이 서로를 생각하는 순간들이, 둘 사이에 특별한 감정이 생기도록 만드는 게 아닐까 가설을 세운 적이 있다. 별로 강력하지 않은 이 가설을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는 우리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강한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분명 결과를 만들어낸다.
요즘 썩 기분이 좋다. 내 앞에 생각보다는 밝은 미래가 펼쳐져 있다는 걸 갑작스레 깨닫고, 마음에 품고 살던 짐을 하나 내려놓은 것 같달까. 존재하는 생명에 대한 은은한 애정도 조금 커졌다. 사람들이 왜 강아지를 키우는지 이제 알 것 같다. 그렇다고 늘 좋은 것은 아니고, 기분이 롤로코스터를 탄다. 행복도가 조금 올라간 반면, 불안도 심해졌다. 나 자신에 대한, 그리고 알 수도 없고 언제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음에 밭이 있다면 늘 내가 가지고 있던 씨앗이 적절한 시기와 환경이 되어 그제야 싹틔우는지, 아니면 외부에서(애정의 대상, 또는 상황, 아니면 특별한 우연) 날아온 씨앗이 어쩌다가 떨어져 열매를 맺게 되는 건지 해답을 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