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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Jun 02. 2021

용서로 가는 먼 길


 나를 갉아먹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도 풀어내기 어려운 분노가 있다. 내가 끌어안고 놓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 오래되어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 버린걸까. 그 분노의 밑바탕에는 분명 내 인생의 책임을 떠넘기려는 비겁한 마음도, 내 삶에서 떼어날 수 없이 가까이에 있는 가해자를 영영 벌주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오래된 분노는 그의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가해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향할 곳 없는 복수심과 억울함이 대상을 가리지 않고 마구 공격하는 것을 본 이후, 용서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 삶에 책임이 있는 것은 자신 뿐임을 인정하는 것, 누군가에게는 평생 불가능한 일이다.



 가까운 사이에서 서로에게 곧잘 입히는 크고 작은 상해들에 필요 이상으로 과민하게 반응해왔던 걸까. 서로의 치부를 보이고 또 본다는 것, 내 친구 중 하나는 이것을 더욱 친밀해지는 과정이라고 본다는 것을 알고 조금 놀랐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 가장 숨기고 싶은 가면 뒷편을 들켰을 때, 관계의 끝을 바라보곤 했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사수하려고 늘 노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 거리가 너무 멀어보였으며, 심지어는 가끔씩은 내게도 그랬다.



 용서는 내일로 향해가는 유일한 길이며, 온전한 나의 삶을 살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인데도, 꼭 어느 시점에는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용서를 하지 않는 것이 곧 생존의 동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어가는 삶이 어떤 모습일지는 정해진 경로를 따르겠지만, 그것이 삶의 유일한 방편이라면 어쩌겠는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 문장이 용서의 모순과 어려움을 모두 담고 있는 말 같다. 내게는 이 눈이, 내 생의 전부일 수 있다. 눈을 빼앗긴 나는, 상대방의 눈으로는 당연히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겪어야만 했던 그 모든 것, 그것은 등가교환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용서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삶에 대한 의욕이 솟아오를 때, 살고 싶을 때 특히 그렇다. 내 안에 무엇을 더 버려야 할까. 불가능해보이는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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