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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Jun 20. 2021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대하여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은 아내의 오랜 친구인 맹인이 '나'의 집에 찾아오는 하루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맹인과의 만남 전부터 영 불편하고 어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데, 이는 그가 맹인에 대하여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맹인과 시간을 보냄에 따라, 특히 함께 TV를 시청하고 그에게 대성당에 대하여 설명하는 과정에서 눈을 감고 손을 맞잡은 채로 대성당을 그리는 독특한 실험을 함에 따라, '나'는 새로운 세계를 맞닦뜨리게 된다. 바로 스스로가 의미부여하여 새롭게 구축하는 자기만의 세계이다.




'나'는 맹인이 볼 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 결여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미리 짐작했기 때문에, 맹인이 담배를 피우고 음식을 집어먹는 방식을 반쯤 당황한 채 지켜본다. 그러나 맹인과 시간을 보내던 '나'가 드러난 아내의 다리를 덮어주려다가 불현듯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닫듯이, 맹인의 세계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 즉, 맹인은 시각 없이 볼 수 있다. 처음부터 결여되었던 시각의 기능 대신, 맹인은 자기만의 세계를 감각하기 위해 발달된 기능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맹인의 세계란, 대성당을 어떤 의미부여도 없이 바라만 봐도 되는 세계가 아니다. 맹인에게는 '나'와는 달리 대성당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 그리고 '개념'이란 게 있었다. '나'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대성당이, 맹인에게는 여러 세대를 걸쳐 일꾼들이 평생을 일한 끝에야 완성되는 대성당이었으며, 곧 그 일꾼들은 완성된 대성당을 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 맹인 자신과도 같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볼 수 있기에 한 번도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던 방식의 사고이다. 공기같이 당연하게 제공되는 것에 대한 가치 부여 하지 않음, 이것이 맹인과 '나'의 세계를 극명하게 가르는 요인 중 하나가 된다.




하나의 대상, 예컨대 대성당을 이해하기 위해서 맹인은 얼마나 많은 사고력과 감각 기능을 동원해야 할까. 마치 '나'의 아내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맹인이 섬세한 손길로 천천히 더듬어내려갔던 것처럼. 그때 '나'의 아내는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가 아니라면 느낄 수 없는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누군가 나를 보고, 이해하고 감각하기 위하여 정성들여 탐구하는 것은 인생에서 흔하게 겪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대성당>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나'의 손 위에 맹인의 손을 얹은 채로 함께 대성당을 그리는 장면이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냐는 아내의 질문에 대답할 기세도 없이, 이제는 눈을 뜨고 있냐는 맹인의 물음에도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그는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말한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이 '어디 안'이라는 것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해보았다. 처음에는 <대성당>이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의 인생 전체가 흘러온다는 말을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 아닐까 했다. 사람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알지 못했던 세상을 경험하고, 이윽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 그러나, 분명 '나'는 맹인을 알게 됨에 따라서 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거부감, 불편함, 편견이 사라졌겠지만 '어디 안'에 있을 때, 그는 홀로 있었다. 그렇다, 그는 그가 일평생 당연하게 사용해온 시각 기능 없이 스스로 구축한 세계 안에 홀로 있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대단했다'.




모든 맹인은 그만의 감각 기능을 발달시키므로 보다 적극적으로 세계를 탐험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분명 '나'의 아내같은 사람은 대성당을 그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의미부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껏 한번도 존재한다고 생각해본 적 없던, 세상을 지각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을 새롭게 습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은 늘 그렇듯, 새로운 사람과 함께 온다.




우리가 늘 머물러있던 안전한 세계 안에서, 다른 사람의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도 배려도 노력도 없이 안주할 때에 불가피하게 편협해진다. 그 세계는 팽창하지 않는 만큼 축소되어 우리를 다른 사람을 들여놓을 틈 없는 아주 작은 방 안에 가두게 된다. '나'의 아내가 그랬듯, '나'도 원치 않지만 동의했듯, 새로운 손님을 때때로 우리의 비좁지만 아늑한 세계에 초대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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