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거의 다 사그라든 지금, 아직 쓸 말이 훨씬 더 많았기에 예정에 없던 솔직함을 더 더해서 쓰려고 한다. 나는 글을 쓸 때 가감없이 솔직해지는데, 이게 가능한 것은 글을 쓰는 순간의 나는 글을 쓰면서 일부 흘러가버리기 때문에. 그러니까 포착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것도 있지만, 글을 쓰면서 내 안에서 해소되어버리는 감정들이 있기 때문이다.
1. 가지고 태어난 것보다 중요한 것
중, 고등학교 때부터 타고난 천재성, 키, 외모, 재능 같은 것에 강하게 이끌렸다. 그 중요성을 과대평가했다고 할까, 그때는 '내가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것'을 동경했고, 내가 행동을 통해서 다다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분명해보였다. 무조건 높은 곳으로, 계량화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최대치에 도달하고 싶었으니까. 깊이라거나 내게만 맞는 나만의 삶의 방식, 그리고 그것들을 찾기 위한 삶의 여정같은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때.
그러나 사람이 평소의 생활습관과 가치관, 매일의 일상으로 다져지는 것이 결국은 본인의 품성―모든 인간은 자기 운명의 건축가이므로―이고, 외모도 일정 나이 이상이 되면 그의 품성이 뿜어져나오게 된다는 것을 이번 일을 계기로 알게 되었다. 그의 영혼을 엿보게 되는 눈빛, 분위기, 말투같은 것이 그가 손에 쥐고 태어난 것보다 더 중요할 수밖에 없음을. 나도 그런 것들에 훨씬 무게중심을 두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2.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의 소중함
엄마는 이 모든 사단이 내가 너무 인생에 아무것도 없어서 일어났다고 본다. 그러나 내 인생에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것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사랑할 시기가 되었으므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다고 본다.
어쨌든, 엄마 말마따나 인생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애써 붙잡지 않았음에도 내 곁을 꼭 지켜주는 가족, 친구, 동기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새삼, 이제야 가지게 되었다. 살갑지 않았을 내게 굳이 다가와서 손을 먼저 내밀어주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텐데.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결과도 손익도 따지지 않고 먼저 마음을 퍼부어주는 사람이 이제는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무끄럽게도, 예전에는 내게 굳이 먼저 찾아와서 호감을 표시하는 사람들에게 천천히 마음을 여는 게 내 인간관계 패턴이었다. 어쪄면 이제는 그걸 좀 뒤바꿀 때가….
3. 내게 맞는 사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 것
예전에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또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물론 그런 사람이 나와도 잘 맞는다면 좋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나와 잘 맞는 사람, 무엇보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 함께 있을 때 편안한 사람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엄마가 내게 했던 말이 있다. 어렸을 때 늘 잠결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도란도란 하룻동안 있었던 일 같은 것을 이야기 나누는 소리를 듣곤 했는데, 그게 그렇게 좋았다고. 나도 그렇다. 엄마아빠는 늘 서로에게 있었던 일, 그리고 내일 함께 할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이따금씩 꺄르르 웃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런 소리가 내게 일종의 심리적 안전망이 되어준 것 같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로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은연 중에 느끼고, 내가 안전하게 거처할 방주같은 것이 있다는 느낌을 받음으로써.
매일매일 조금씩 변하는, 그러면서도 10년 전과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도 똑같은, 서로를 계속해서 이어줌으로써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 일로 배웠다. 어쩌면 관계에서 제일 중요할 건 소통에 대한 문제일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