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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Jun 29. 2022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었다.

 하릴없이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문밖의 일들을 씻어낸다. 나무늘보라도 된 것처럼 느린 움직임으로 샤워볼을 집어서 바디워시를 짜려고 했는데 샴푸를 짜는 바람에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웃을 힘이나 감정도 없어서 소리만 뱉었다. 하하. 기술은 빠르게 발전해 가는데 내 몸 하나 씻겨줄 수 있는 기계가 없다는 것이 이상하단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샤워를 마쳤다. 적당히 물기를 닦은 후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의자 등받이에 기대니 젖은 머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져서 의자와 장판 위를 적신다.


 할 일은 정리도 안 된 상태로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서 눈만 깜빡일 뿐이다. 해야 할 것은 많은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 미뤄둔 공부도 해야 하고, 밀린 연락에 답도 해야 하고, 쌓인 글도 수정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못하겠다. 이 상태로는 효율성이 떨어지니 30분만 자고 일어나서 하자는 생각과 아직 할 일이 남았는데 잠이 오냐는 마음이 충돌하며 삐걱거리는 몸으로 무언가를 시작했다. 녹슨 부품으로 만든 기계처럼 뚝딱거리지만 어느 것 하나 정리된 일이 없어서 하루가 끝날 때쯤에는 ‘오늘 뭐 했지’하고 자책과 ‘내일은 좀 더 잘해야지’하는 반성이 반복된다.


 이런 날이 모여 명치 윗부분을 무겁게 짓눌러오는 답답함으로 물밖에 나온 고기처럼 숨을 쉬기가 불편하다. 밤고구마를 삼킨 듯 퍽퍽해서 가슴을 두드려 내려보아도 소화가 되지 않는다. 이럴 때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서 억지로 쥐고만 있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거나 물을 마셔봐도 개운하지가 않다.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 체한 것 같은 답답함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점점 스스로의 모습마저 이해할 수 없다. 일하는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평소라면 하지 않을 사소한 실수가 늘어간다. 아, 진짜 도망갈까, 도망가자.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그냥 이대로 있으면 내가 못 견딜 것 같아서 ‘여기에서 벗어나자’하는 생각뿐이었다. 있던 자리를 정리하고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왔지만 끝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한 후, 잠시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살만하다고 생각하며 숨을 길게 내뱉을 때쯤 비슷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분명 전과 다른 상황이었지만 막혔던 부분이 또다시 문제였다. 투명한 막에 갇혀 버린 것 같은 답답함. 앞이 보이지만 닿을 수 없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달라지는 것은 없구나. 명치 아래 깊은 곳을 한 대 맞은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는 아픔과 함께 어렴풋이 깨달았다. 지금껏 가져온 나의 모습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 필요하다. 지금의 모습과 노력만으로는 오늘 이상의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엔 돌고 돌아와도 부딪친 곳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도망을 쳐도 다르지만 비슷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을 겪고 나니 넘어야 할 산임을 알게 되었다. 도망쳐봐도 이곳을 넘지 않으면 해결할 수가 없나 보다. 넘거나 뚫거나 멀리 돌아가더라도 지나가야 하구나. 도망갈 수 없구나. 도망가고 싶은데 그곳에도 답은 없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떠나도 해방감은 잠시뿐, 다시 돌아와서 해결해야 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쉬어갈 시간이 필요하단 것을 알았다. 인생은 마라톤이라더니 아직도 달려야 할 코스가 얼마나 남은 건지 잘 가늠되지 않는다. 긴 여정에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힘을 충전할 수 있는 쉼표를 만들자. 조금씩 자주 쉬어가며 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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