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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Apr 25. 2022

가진 게 없다면 채워갈 것이 많겠지요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를 마주할 때면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조명을 받은 듯 선명해지는 저 사람과는 다르게 무채색을 가진 내가 볼품없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싫다. 무기력함과 패배감은 자꾸만 깊은 수렁으로 끌어당기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나약하고 별 볼 일 없는 모습을 감추고 싶어서 크게 부풀리고 꾸며봐도 그 속에 감추인 나는 끝없이 작고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함께 운동장을 뛰놀던 친구들은 어른이 되어가는데 나만 아이에 머물러있는 것 같은 초조함이 나를 더 작아지게 만들어서 친구를 만나는 일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성적과 진로를 고민하던 우리는 어느새 자라서 주식과 부동산을 이야기하는 성인이 되어있었다. 시험 끝나면 무엇을 할지 떠들던 아이들은 집과 차와 연봉을 말하며 한숨을 쌓아갔다. 내 몸과 마음의 키는 성장을 멈춘 듯 그 자리에 머물러있는데 너희는 훌쩍 자라 있었다. 닿을 수 없는 차이라고 여겨서 그런지 따라가려는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어떻게 그리 초연해? 항상 욕심도 없고 혼자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 같아.


오해다. 인정받고 싶은 욕심과 이루고 싶은 목표를  밖으로 꺼낸다면 그런 말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저 나의  위치에 한계를 느끼고   있는 일이 아니 판단 몸을 사린 것이었다. 타인과의 경쟁은 자격지심만  키운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배웠기에 꽁무니를 쫓는 일은 포기했다. 이미 벌어진 간격을 따라 애써 뛰어봐도  발만 아플 뿐이다. 종종걸음으로 달음질해봐도 따라갈 수없어서 성큼성큼 멀어지는 뒷모습만 보며 쓰린 마음을 씻어내야 했다. 어설픈 흉내에 따른 결과는 가루약을 털어 넣은 입안보다  썼다. 아무것도 없는 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환상 같은 꿈을 꾸며 잘될 거라는 말을 했다. 다시 실패를 맛보고 싶지 않아서 시작도 못하는 일이 많아졌다.   


 실패가 두려워 시작도 못했다는 건 부족한 나를 들키기 싫다는 뜻이었다. 빈종이처럼 아무것도 없는 나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시작이 미뤄진 만큼 결과도 더뎌지며 아주 작은 희망이나마 품을 수 있었다.  

 ‘내가 하지 않아서 그렇지 막상 하면 엄청난 재능이 있을지도 몰라.’

허황된 기대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안심시켰지만 시간이 흘러도 채색은 물론이고 밑그림 하나 없는 종이일 뿐이었다.


 미흡한 결과물이라도 얻기 위해선 시작을 해야 한다. 망치기 싫어서 연필도 들지 않은 채 상상만으로 완성할 수 없다. 가진 것이 없어도 무언가를 해야만 달라진다. 오히려 좋다. 채워진 것이 적으니 새로운 것을 담아갈 수 있다. 비어있는 종이를 가득 채운 후에도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면 된다. 습작이 많으면 그만큼 쌓여가는 나의 몫이 생긴다. 차곡차곡 모아 온 실패는 경험이 되어주고 조금 더 나은 시선을 갖게 해 준다. 성공이라 불리는 것도 내 안에서 피어난다. 만족스러움이 들었다면 그걸로 되었다. 충분하다.


지금 가진 것이 없다는 이유로 현실을 마주하지 않고 피하기만 한다면 영영 도망 다녀야 한다. 아무리 피해봐도 결국은 마주하게 된다. 맞닥뜨리고 보면 사실 별거 없다. 그냥 서툴고 삐뚤어진 선일뿐이다. 처음부터 가진 것이 많고 능숙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드물다. 각자 시작의 차이는 있어도 끝까지 가보지 않으면 결과는 알 수 없다. 어찌할 수 없는 조건이나 현재를 원망하기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서 결과를 마주하겠다. 모든 걸 겸허히 받아들이지는 못하더라도 분한 마음으로 선을 하나 더 그려보려 한다. 조금은 마음에 드는 결과를 만날 때까지 나를 더 채워가겠다. 아직은 부족하더라도 나만의 선과 색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가진 것이 적다고 주저앉아있기만 해서 좋아지는 것은 없다. 무기력감과 우울함, 자기혐오와 잘못된 연민이나 동정으로 나를 더 힘들게 만든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움직임이 필요하다. 큰 계획과 움직임은 부담스럽고 더 큰 절망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럴 땐 작은 목표와 성취감이 좋다. 목적지를 정해두고 산책을 나가거나, 밥을 차려먹고 설거지를 하는 것처럼 사소하지만 뿌듯함을 이룰 수 있도록 움직인다.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무언가를 이뤄가는 나에게 칭찬해주자. 어릴 적 모으던 칭찬스티커를 붙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매일 작은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면 달력에 '참 잘했어요'라고 쓰인 스티커 하나를 붙인다. 한 달 동안 빼곡히 모아 온 스티커처럼 조금씩 나를 채워가자. 나도 모르게 달성해온 목표가 하나둘 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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