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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섬 Mar 20. 2022

삶의 가치, 실존과 형이상학

꽃과 음악을 느껴 보세요, 그것들은 아름답습니다




'다름'을 이해하시어 생각만 담아시고

감정은 담아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의외로 전 단순하여,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요즘 이러한 기간인가 봅니다.

기록으로 남겨두려고 함이니,

널리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해독할 수 언어는 역시,

해독할 수 없는 언어인 것일까.


시는,

그것을 접한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본질은 한 사람만이 알 수 있지.


의식의 흐름대로 마구잡이로 써내려간 상념을,

정제시키지 않은 채로 브런치에 복붙을 했다.


그 글을 가장 근접하게 이해하실 수 있는 분이

뒤늦게라도 다녀가셨음을 확인했다.

나와 같은 성별을 가진 작가님이다.


차원을 열어버린 자는 외롭다.

공허함을 나눌 수가 없으니, 여전히 공허하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상념들에, 나와 비슷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세상을 피상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無와 공허를 마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거.


사소한 것에 웃고 기뻐하고

고통스러워 할 수 있었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잊지 않으려 애쓴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나의 봄에게,

안녕 하고 인사를 해버렸거든.

그것은, 내가 원한 일이 아니었다.




암환자의 시기를 경쾌하게 보냈다.

그것은 니체였다.

니체를 지나왔다.

그래서 니체가 제시한 방법을 이해한다.

체득을 한 번 겪었다.

그런데 암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부존재가,

내 삶에 그 모습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있을까.

그런데 있더라.

그 고통을 이겨내려면,

내 생명력이 차원을 열어버려야 한다.

새로운 세계는,

딱 하나의 감정만이 존재한다.

그 외의 감정을 만들어내는 방법이 퇴화해 버린다.

마주하게 되는 것은,

無와 공허 뿐이다.

이것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있다.




그럼에도 니체를 살아가라는 글을 쓴다.

니체를, 진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해하면, 니체를 논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니체는 제시를 했지만,

니체 역시 니체를 살 수 없었다는 것은 모순적이다.

니체는, 자신이 그 삶을 살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우생학이 왜 언급되었을 것 같은가.

그것은 의식의 흐름에서 발원된 것이었다.

지금의 인간은, 니체를 살지 못한다.

인간에서 더 진화된 단계,

위버멘쉬가 그 삶을 살 수 있음을 언급한 것이었다.

언젠가는 인류가 위버멘쉬로 진화하겠지, 하고

자신의 통찰을 글로 남겨두었던 것뿐이다.

그것은 생물학적 진화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기에,

의식의 흐름에 의해 우생학이 언급된 것이었다.

니체가 그 시기에 등장했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가 다음 단계로 진화하기 위해서

니체를 필요로 할 것임을 세계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이제 니체가 틀렸다, 맞았다를 다시 언급할 수 있는가?

니체를 논하는 것 자체가,

니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의 출구를,

가슴으로 이해해 버렸다.

그런데 머리는 니체를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한다.

그 둘이, 대립을 할 것 같은가?

nope, 전혀.


나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세계에 살면서

프리드리히 니체를 머리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형이상학과 실존의 경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늘 웃고 있는데

내 마음은 웃지 않아도

나는 늘 웃을 수 있구나.


이 표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퇴화해버린 봄을, 기억 안에서만 기억하며

그 흉내를 내고 있는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잊지 않으려 애쓴다.

그 봄을 잊어버리면,

삶을 유지해갈 수 있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된다.




삶 안에 녹아들어

그 안에서 다양한 감정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고통을, 고통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무아지경, 몰입 기타등등.

명상이든 마음챙김이든 그러한 수단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다는 그 상태.


환경을 기민하게 해석하여 판단하는 a라는 기관이 있다.

그 환경이란 것에는 의식도 포함이 된다.

그 상태는 a가 극도로 평온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a가 동인(기제) 되는 b라는 기관이 있는데,

b가 a의 자극에서 자유로워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훈련으로도 체득이 가능하다.

잘 훈련된 사람은, 감정의 동요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경지가 임계치를 넘어서면

사람의 심리가 직관적으로 읽힌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세상을 깊게 헤아릴 수 있는 눈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그 사람들은,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흑백필름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타인의 심리를 물 흐르듯 흘러가도록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그러해야 함은, 그러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타인이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함부로 자신이 손상하게 될까 봐 관여를 꺼리게 된다.

단지 날 찾으면, 도움을 줄 뿐이다.




속이 좁다는 말이 있다.

타인의 심리를

깊게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표현이다.

깊게 헤아리지 못하는 자가,

세상을 깊게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은가.

사람이 세상이고, 세상이 곧 사람이다.


사람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 살아가기가 고되다.


그래서 카르마가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은 자업자득이고,

널리 보면 인과응보가 지배한다.




그래서 아르투어의 출구를 이해하지 못한 자가,

형이상학을 삶의 가치로 제시하는 것을 경계한다.

존재는, 실존에 있을 때

가장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니체를 살아야 한다.

니체를 좇으며 흉내라도 내야 한다.


다룰 수 없는 자가 무기를 다루면 해가 된다.

그것이 두려울 때 고통이 따른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삶의 가치로 형이상학을 제시하는 것만은,

맞서서 논쟁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존재가 생명력을 부정하면,

부존재를 추구하게 된다.


형이상학의 세계는,

마주하게 되면 空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굳이 그런 삶을 왜 살려고 하는가.

존재 자체가 기적인데,

왜 그 기적 같은 삶을 허비하려 하는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감정이

단 한 번 경험할 수 있는 축복임을.

영겁의 세월 동안 찰나의 빛이 되어 살아가더라도

지금 내가 이곳에 존재하며

기쁨과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을,

그것이 축복임을 왜 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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