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나는 자꾸 2025 라는 오타를 낸다. 오늘은 감기기운도 있고 바깥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주제는 ‘시나리오로 남은 사랑들’이다.
직업이 작가이다보니 아무래도 내가 살아온 삶 중에 어떤 것은 기록이 된다. 나는 지난주 논문 초록을 썼다. 초록은 본 심사 전에 쓰는 박사학위 논문을 뜻하는 말인데, 나는 제작 박사이기 때문에 내 시나리오에 대한 작품 보고서의 형식으로 초록을 쓴다.
결말부를 쓰다가 울었다.
물론 좀 볍신같은 일이다. 자기 글쓰다가 우는 작가들을 나는 좀 싫어하는데 요즘 내가 좀 그렇다. 지난주는 체력적인 한계를 느꼈다. 슬픔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1) 일하고 (무슨 일인지는 3번째 월급 받는 날 말할거다) 2) 논문 초록 쓰고 3) 강의하고 4) 면접봤다. 아무래도 예의를 좀 차려야 할 것 같아서 구두를 신고 온 서울을 다 돌았다.
발톱 빠질 뻔했고, 이상적인 키(173에 7센티 신으면 180센티니까!)가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정수리를 구경했다. 요즘은 자꾸 손에 힘이 빠져서 뭘 떨어트린다. 그렇다고 나이 34에 들고 다니는 물건들에 다 돼지꼬리 돌돌이를 걸어놓자니 웃겨서 카라비너로 되는 건 좀 카라비너 걸어놓고 지내니까 등산 마니아처럼 보이는 몰골로 다니게 되더라. 물론 난 등산은 해본 적 없고 안 좋아한다.
“일이 안 풀리면 관악산을 가야 한다”는 짤을 봐서 친구들과 관악산을 가기로 했다가 친구 A가 “넌 임마 아차산이라도 가보고 ‘악’자 붙은 산을 가야 해”라고 한 말이 제법 합당하다고 생각해서 'ㅇㅇ 오케 아차산 다녀오겠음'하고 등산화를 샀다.
면접을 붙는 바람에 아차산을 못갔는데 친구 B가 아차산은 ‘연애운’이라는 것이다. 아 언제 대한민국의 산지들이 운을 파트별로 나눠서 담당하게 되었나 한참 웃었다. 물론 면접은 최종에서 안됐다. 아하하 슬프다. 슬픈 김에 초록 마저 써서 냈다. 발표 자료 PPT도 다 만들었다. 앉은 김에.
주제인 ’시나리오로 남은 사랑‘으로 돌아와서. 사르트르는 보부아르를 사랑했다. 니체는 살로메를 사랑했고, 나는 달리의 고백을 좋아한다. 썩은 양파를 겨드랑이에 끼고 무릎을 면도칼로 난도질해놓고 “나는 사실 이런 모습이지만 당신을 사랑하오. 평생을 사랑하겠소.”라고 하자, 그걸 들은 상대의 표정은 전해지지 않지만 ㅇㅋ 해서 평생을 사랑했다고 한다.
달리의 고백은 재밌어서 좋아했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고백은 타짜의 고니가 하는 고백이다. “나는 사랑이라는 놈은 믿지 않지만, 신의를 믿소. 당신이 나를 남편으로 받아준다면, 나는 남편으로서의 신의를 다할거요.” 화란의 대답을 못 들어가지고 좀 아쉽긴 한데. 사람들은 사랑 고백을 할때 '나는 당신의 가장 좋은 면을 보겠습니다'. '혹은 당신에게는 나의 가장 좋은 면만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건실하고 성공적일 겁니다'. 약속하지만 나는 낭만을 믿지 않는다. 사람은 글쎄, 몸이 있는 존재고 몸은 배고프면 예민해지고 추우면 짜증나고 병들면 추악하다.
내가 믿는 것은 나에게 몸이 있는 것 만큼이나 마음이 있다는 것 뿐이다. 몸은 그러하고, 마음의 성질은 반대다. 배고프면 어떻게 벌어먹지 생각하고 그 와중에 창피하지 않게 벌어먹어야지 생각한다. 추우면 옷 입을 것 생각하고 사람도리에는 어떤 옷이 어울리지 생각하고. 병들면, 아 나도 추할 수 있겠구나 남에게 미안해하는 마음이나 혹은 측은해 하는 것. 내가 믿는 마음의 성질은 뭐 그러해서.
달리의 고백은 나에게는 “나에게는 몸도 있고, 마음도 있는데.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과 몸에는 추악함이 있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할테요” 처럼 들리긴 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삶이 한 산을 넘어가면 더한 산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넘어가봤자 더 한 놈이 있을텐데... 아쒸... 이걸 왜 굳이 빨리 넘겨야 하지? 하는 생각도 좀 들고.
이건 대학원생들의 농담이다. 아주 부적절할 수도 있다. 학생들이 교수한테 화가나면 교수짱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으면서 '이 새키... ㅎ' 한다는데 나의 초록은 과연 부끄럽지 않은 학위 논문이 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난 좀 부끄러울 학위 논문을 쓴게 '시나리오로 남아버린 나의 사랑들에 대한 시나리오'로 논문을 썼으니까.
결말을 쓰다가 운 이유는 이 문장 때문이다.
본 작품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어쩌면 평생 나와 만날 일 없는 누군가가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자 했다. 관객이 전혀 알지 못했던 한 인물의 삶을 따라가며 자신의 삶과 닮은 지점을 발견하는 순간, 영화는 가장 영화적인 경험을 만들어낸다. 나와 무관해 보이던 타인의 삶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발견하고, 그 경험이 현실의 삶에 작은 인식의 변화를 남기는 순간이 바로 그러한 순간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영화의 본질은 극 중 인물과 친구되기이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을 경험하고 환대하도록 만든다. 데리다는 『환대에 대하여』에서 〈안티고네〉의 사례를 통해, 그녀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울음을 이해하거나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보아 달라’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정하의 울음을 단순히 ‘보는 것’. 관객들이 이 영화를 통해 수행해야 하는 행위는 어쩌면 이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하고 환대한다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이 문턱을 넘어 ‘내 안으로 들어오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행위에 가깝다. 이는 단순한 접근이나 도달이 아니라, 타인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일이다. “어서 들어오라, 내 안으로.” 이 환대의 행위는 궁극적으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애도를 함께 애도하는 행위로 기능한다.
우리는 이 순간에 다시 주체가 된다. 누구를 환대하고 사랑하며, 내 안에 들일 것인가? 그것은 오직 주인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경험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이해’는 영어 표현으로 말하면 ‘To put oneself in someone else’s shoes’, 곧 타인의 신발을 신고 잠시 걸어보는 경험에 가깝다. 이는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서 있는 자리와 환경을 상상하고, 그 공간의 공기와 온도를 감각해보는 시도이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는 이해란 누군가와 완전히 동일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신발을 잠시 빌려 신어보는 상상적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의 지평을 확장하는 일이다. 스크린은 그 불가능한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이며, 관객 역시 극중 인물의 신발을 신어보는 또 하나의 참여자가 된다.
정하, 재영의 상황에는 그들의 상실이 아프다는 것.
관객들은 그들(정하, 재영)의 신발을 신고나서 걸은 길에서 고통을 목격하고 경험한 후에야 이해의 주체가 된다. 나의 사랑하는 얼굴이 아프다는 감각.
누군가의 안부, 안녕을 묻고 그들의 공간, 삶에 찾아가 노크를 하는 행위는 이 감각에서 기인한다.
관객들은 이 감각을 바탕으로 엔딩 시퀀스에서 정하와 재영이 나누는 미세한 배려와 이해의 순간, 즉 외로움(본질적인 결함)을 인정하고도 서로 곁에 머무르려는 태도(미덕)를 함께한다.
이 가상의 여정을 동행하는 것이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여는 행위. 고립된 타인을 꺼내는 행위.
결국 스크린은 관객에게도 미약하지만 실제와 같은 온기가 닿는 환상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영화의 엔딩 시퀀스는 결국 정하의 신발을 신고 재영을 직접 만나러 여행을 떠나 얼굴을 만져보는 상상적 경험을 통해 관객 그들 스스로의 삶의 지평을 확장하게 하는 매개로 작동하길 바라며 썼다.
이 부분이 슬펐다.
나는 시나리오로 남아버린 사랑들에 대해서 늘 그런 생각을 한다. '(험한 말) 왜 알려까지만 주고 나를 떠났을까?', '차라리 알려주지 않고 떠나면 머리가 덜 복잡했을텐데'. 가르쳐줌에 감사하지는 못하고
'애도가 뭘까?' 하는 생각을 한다.
28살에 쓴 시나리오를 박사학위작품보고서로 쓰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다시는 영화를 안 보고 싶을 만큼. 집에 오면 쓰러져 잘 수 있을 정도로 바쁘고 몸이 고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품의 로그라인은 28살에 헤어진 정하가 삶으로 돌아오는 내용인데, 나는 34살이 되어서 정하가 삶에 돌아오도록 도와주는 재영이의 결함과 나이로 이 시나리오를 보내는구나. 생각했다. 오늘은 마음이 폐허같다.
스크린에서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