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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Aug 22. 2016

피아노에 대한 예의

그날 엄마는 피아노를 사오셨다. "아빠가 사주는 거야." 엄마는 그렇게 강조했다. 아빠는 무엇인가. 아빠는 석달에 한 번 집에 들어오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의 물주였다. 그는 언제는 풍족했다. 그는 금광으로 억대부자가 된 집안의 장손이었다. 그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일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성실한 면도 있어서, 목장을 할 때는 집에 있으면 가장 일찍 일어나 소 젖을 짜고, 우유통을 날랐다. 그는 과묵했지만 잘 웃었고 예의 바르며 불의를 못참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석달에 한번씩 집에 올 때마다 선물을 사왔다. 모 아동복의 코트, 레고의 우주 시리즈, 양배추 인형 등등. 그해 크리스마스에 나는 인형의 집을 부탁했다. 인형의 집은 종이 재질이었는데 3만원이나 했다. 엄마는 인형의 집을 포기시켰다. "나무도 아니고 종이로 된 주제에 3만원이라니!".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턱하니, 내 생일 선물로 무려 100만원이나 한다는 피아노를 거실에 들인 것이다. 이럴 때 엄마는 통이 컸다. 여하튼, 우리집에는 피아노가 생겼다. 나는 피아노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피아노 학원에 다녔지만, 혼자 한 시간을 연습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친구도 생기지 않았다. 나 홀로 피아노 방에서 연습을 했다. 손가락만 움직였다. 영혼 따위는 쏟아붓지 못했다. 어떻게 쏟아부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 이사를 했고, 이사를 한 후로는 피아노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대신 한 장짜리 악보를 사다가 혼자 연습했다. 나는 누구나 좋아하는 그 유명한 캐논을 연습하거나, 스콜피언즈의 곡들을 모았다. 엄마가 좋아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좋아하는 곡을 치면, 엄마는 내 솜씨가 아주 뛰어난 것처럼 흥분했다. 우리집에서 일하던 아주머니는, 노엘을 좋아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 노엘을 쳤던 날 아주머니는 살짝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엄마에 따르면 아주머니는 "지금은 가정부지만, 엘리트 같애. 이전 아줌마들이랑은 달라."라고 나에게만 살짝 얘기했다. 엄마는 그 정도 예의는 갖출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아줌마와 함께 빨래를 개며 수다 떠는 걸 좋아했고, 아줌마랑 같이 커피를 마시며 파운드 케잌을 먹는 것도 좋아했다. 


엄마에게 피아노는 동경의 산물이었다. 엄마는 여섯 형제의 셋째였다. 그것도 첫째가 딸, 둘째가 아들, 그리고 태어난 게 엄마였다. 첫째는 몸이 약해서 우대 받았고, 둘째는 아들이라 우대 받았다. 엄마는 아랫동생들을 돌보는 일을 자연스럽게 맡게 되었고, 학비는 첫째, 둘째, 막내 순으로 내게 되어 있었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 형제들을 부러워했다. 첫째, 그러니까 나의 큰이모는, 배운 게 많다. 둘째, 그러니까 나의 외삼촌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배울 기회가 엄마에겐 오지 않았다. 엄마는 그저 고등학교까지 무사히 보내주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해야 했다. 외할머니는 말했다. 너는 이쁘니까 부자랑 결혼하라고. 외할머니는 경영자였다. 당구장과 다방을 경영했다. 힘들 시절도 있었다. 마침 그 힘든 시절에 엄마가 고등학생이었다. 외할머니는 여자도 당당하게 일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딸에게는 그런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돈많은 남자와 결혼하길 원했다.

여하튼 그런 연유로? 엄마는 피아노를 동경했다.

내가 피아노를 치게 되자, 엄마는 너무나 기뻐했다. 그리고 손님이 오면 꼭 "얘, 너 피아노 잘 치잖아. 한 곡 쳐봐."라고 노래를 불렀다. 안타깝게도 나의 실력은 그저 체르니 100이 넘은, 체르니 30을 간신히 칠 수 있는 정도였다. 나는 꼼꼼하거나 꾸준한 성격이 아니었다. 생긴 것과는 달리, 털털하고 느긋했다. 노력이란 단어보다 요령이란 단어를 타고 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연습을 하지도 못했고, 그다지 재능도 없었다. 그저 내 또래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피아노를 쳤을 뿐이다. 그래서 엄마의 그런 주문을 한 번도 받아주지 못했다. 엄마는 아쉬워했다. 하지만, 엄마는 기뻐했어야 한다. 엄마 친구들 앞에서 애써 주름 잡아 놨는데, 형편없는 실력을 드러내면 엄마는 당연히 쪽팔려 할 것이다. 여하튼, 엄마는 딸이 피아노를 친다는 자신의 꿈을 하나 달성했다. 

우리집의 피아노는, 엄마의 어린 시절의 가난함을 극복하는 하나의 상징이었고, 엄마의 삶에 구원을 주는 상징이었으며, 아빠란 존재가 우리에게도 있다는 상징이기도 했다.


그래, 아빠 이야기로 돌리자. 내 열번째 생일날, 피아노는 우리집 거실에 찾아왔다. 아빠는 그렇게 우리집으로 돌아왔다. 아빠가 어디서 무얼하다 왔는지 엄마는 물었을까 묻다가 부부싸움도 했겠지. 하지만 피아노는 여러모로 엄마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가끔 집에 오는 아빠가 또 집에 왔다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했다. 아빠가 집에 왔고, 그는 자신의 피아노 실력을 과시했고, (배우지도 않았는데 아빠는 피아노를 쳤고, 드럼을 쳤으며, 노래도 잘했다) 엄마는 그또한 기뻐하였다. 엄마에겐 "아빠가 사 준" 피아노였다. 남동생은 아빠를 잘 따랐지만, 나는 조금도 따르지 않았을 뿐더라 아빠랑 말도 섞지 않았는데(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나와 놀아주지도 않고 집에도 잘 안오는 아빠였는데), 말을 시켜도 쌀쌀맞게 굴었다. 엄마는 내가 아빠에게 따뜻하게 대하면 아빠가 더 집에 머무르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그래서 아빠를 강조했다. 그래 나에겐 아빠가 있었군. 저 남자가 나의 아빠군. 저 아저씨가 이 피아노를 사오셨군. 피아노를 사온 저 아저씨가 우리 아빠라 다행이군. 으로 넘어가는 상상력보다, 왜 더 싼 인형의 집은 안 사주고, 피아노를 사준 건지, 답답하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렇게 그날 나는 열살이 되었다.


내가 열 한 살이 된 가을, 아빠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리고 우리는 집을 팔았다. 피아노가 놓여있던 거실에는 초록색 양탄자가 깔려있었는데, 큰이모는 그날 밤, 그 양탄자가 피로 물드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우리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 아파트에는 거실 따윈 딸려있지 않아서 피아노를 놓을 공간이 없었다. 우린 여러번 이사를 했고, 엄마는 피아노를 의사를 남편으로 둔 이모네 집에 맡겼다. 이모도 의사인 남편을 따라 한국 여기저기 병원으로 이사를 다녔고, 아이들이 독립한 후 미국 이민을 생각하면서 피아노 처분을 우리에게 의뢰했다. 피아노는 나와는 일년 밖에 같이 살지 못했고, 내가 서른이 될 때까지 이모네 집 거실에 아무도 치지 않은 채 놓여있었다. 


"얘, 피아노 어쩔 거니? 지금 한국에서 팔아도 돈이 얼마 안 된대."

엄마는 전화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게 니 아빠 유산이야."

그렇다. 아빠는 딱 피아노 하나 물려주고 돌아가셨다. 우리집은 아빠 장례를 치룬 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교통사고였는데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고, 트럭 운전수는 우리 아빠가 운전을 잘못했다고 경찰에 얘기했고, 우리는 고장난 트럭 비용과 트럭 운전수 병원비까지 내야했다. 집을 팔아서 아빠의 묘지를 샀고, 작은 아파트의 전세비용으로 썼다. 그리고 남은 건 이년치 생활비가 다였다. 아빠가 남겨준 피아노.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은, 피아노를 가져오란 소리다. 나는 배편을 예약했다. 일본까지 가져오는데 무려 150만원하고 30만원이 더 들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이사를 할 때마다 30만원씩 들었고, 지난 번엔2층 거실에서 1층 방으로 피아노를 옮기는데 50만원이 더 든 것 같다. 아빠의 유산은, 그 정가보다 더 많은 지출을 나에게 요구했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더이상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 어른이 된 어느날, 나는 나를 더 잘 알게 되었다. 나는 피아노 따위 처음부터 맞지 않는 사람이다. 재능도 없었으며 연습을 꾸준히 하는 타입의 성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피아노는 1층 서재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다. 얼마전 조율도 했다. 그저 조율을 했을 뿐이다. 조율사는 "좋은 피아노예요. 앞으로 50년은 충분히 쓸 거예요. 따님들 피아노 시키세요."라며 나는 알지도 못하는 곡을 연주했다.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아름답다고 밖에 표현하지 못할 그런 곡이었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래, 저건 아빠의 유산이기 전에 피아노인 것이다. 누군가 눌러주어야 소리가 나는. 그것도 눌러만 주면 아름다움이 가득찬 소리가 나는.


나는 아직도 무겁다. 250킬로 피아노의 무게가 마음에 얹힌 듯이 무겁다. 나는 평생 저 피아노를 끼고 살게 될 것이다. 소심해서 피아노를 버린 후, 아빠 엄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 게 뻔하다. 차라리 인형의 집이면 좋았을 텐데. 엄마 아빠의 마음따위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왜 인형의 집이 아니었을까. 고요히 잠든 피아노가 깰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더 나이가 들면 나는 또다시 피아노를 치게 될까. 그럴 날이 와도 좋고 안 와도 좋다. 그나마 노후에 피아노를 즐길 여유가 생기면 다행일 것 같다.


여하튼 나는 아빠가 남긴 피아노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서, 지금 내 곁에 모셔두고 있다. 피아노에 대한 최선의 예의를 다한 셈이다. 그러니 이제, 피아노에서 조금 자유로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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