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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Sep 16. 2016

팔자소관 인생살이, 뮤지션 박보

#김민정의인터뷰

#이 기사는 2001년 인터뷰 기사입니다


박보

1955년 山梨현출생.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

78년 다이나마이트 타모츠로 솔로데뷔. 79년 히로세유고(廣瀨友剛)로 ‘왜불러’발표. 80년 한국 방문후, 박보로 개명. 83년 미국에서 ‘어기여차’‘사이케데릭 사무라이’를 결성, 음악활동을 벌인 뒤, 92년 귀국, 도쿄비빔밥클럽에 참여 일본활동 재기. 97년 박보밴드 결성. 98년 서울에서 신촌블루스와 공동 컨서트. 다큐멘터리 영화A의 음악을 담당. 


벤처즈의 카피 밴드의 드러머. 그것이 음악과의 만남이었다. 1979년 송창식의 ‘왜불러’로 데뷔, 송창식씨가 보내준 비행기표로 한국과 대면한 후 ‘박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음악의 인생의 문을두드렸다.

그는 ‘팔자’라고 하였다. 한국어를 잘 하지 못한다면서도 한국어로 ‘팔자’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자신이 박보로 이름을 바꾼 것도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한 것도 한국의 신촌블루스와의 만남도 모두가 팔자라고 하였다. 팔자라는 말로 자신의 생을 살아간다는 건 그만큼 삶을 긍정한다는 뜻이 아닐까. 그만큼 고달픈 일도 있었다는 게 아닐까 한다. 팔자라는 말로 자신의 생을 웃어넘길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한다. 

  

한국적 요소와 록을 접목시킨 독특하면서도 애틋한 음악의 삶을 살고 있는 박보. 그의 음악엔 항상 어떤 의미가 도사리고 있다. 환경문제를 노래하는가 하면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이야기하고 반전사상을 이야기하고 재일한국인의 마음 깊은 곳을 풀어놓는다. 물론 그런 그의 음악에서 설득력이란 요소를 빠뜨릴 수 없다. 

그가 팔자라고 표현하는 박보의 인생에는 재일코리언으로서의 갈등과 자유, 그리고 음악을 통해 만난 이들과의 교류가 있었다.


-먼저 음악을 시작한 동기가 무엇입니까?

형님께서 벤처즈 카피밴드를 하고 있었는데, 드러머가 없다고 해서, 드럼을 쳤었어요. 그대로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죠.


-데뷔 당시 히로세 유고라는 이름에서 박보로 개명한 이유는요?

1979년 송창식의 ‘왜불러’로 데뷔를 하고, 송창식 씨가 보내준 한국행 비행기표로한국에 갔지요. 한국에서 아시아를 느끼고 내 자신의 뿌리를 생각했죠. 한국에서 돌아와서 박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 이후엔 오랜 미국생활을 하셨지요? 

박보라고 이름을 바꾸자, 일본의 시민운동단체로부터의 요청이 늘었습니다. 평화운동, 환경운동, 인권운동, 반전운동 등 여러 시민운동에 음악으로 참여를 했습니다. 82년에 로스앤젤리스에서 반핵운동 컨서트가개최되었는데, 아는 친구의 소개로 컨서트에 참여하러 83년 미국에 갔어요. 데몬스트레이션까지 했는데, 컨서트가 캔슬이 됐지요. 편도 티켓을 구입했기 때문에 돌아갈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대로 10년이나 눌어 앉아있었죠.


-미국에선 어떻게 지내셨나요?

스트리트 뮤지션으로 반전, 인권 등을 주제로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던 중 네이티브 아메리칸의 집회에참여해 바지저고리를 입고 한국민요과 일본민요등을 불렀죠. 다른 부족과의 세션을 안하는 그들이 같이노래하자고 그러더군요. 그때부터 네이티브 아메리칸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KPFA라는 FM방송국에서 2시간짜리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제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들도늘었습니다.


-미국에서도 꾸준히 음악생활을 하신 거군요.

박보라고 이름을 바꾼 바람에 미국까지 가버린 겁니다. 사실, 이름을 바꿀 때 반대를 많이 받았었어요. 안 팔릴 거라고. 그게 분해서 미국에서 성공해야한다고 마음 먹었죠. 록음악의 본고장에서 미국에서 성공하면일본에서도 받아줄거라 생각했고, 성공할 때까지는 일본에 돌아가지 않을마음으로 음악활동을 했습니다. 


-다시 일본에 돌아오시게 된 경위는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형과 둘이 힘을 합해서 일본에서 무언가를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아버지 말씀을 하나의 인생의 메시지라 생각하고 일본 활동을 재기했습니다.


일본활동 재기 후, 96년 그는 한국에서 라이브 무대를 가졌다. 한국민요 ‘뱃노래’와 ‘한오백년’, 그리고 그의 작품 ‘아버지’와 ‘이제 그만해’를 준비했다. 전부 한국어로 준비를 했음에도 검열에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는 재일한국인의 마음을 노래하였다고 하여 허가를 받았지만, 이제 그만해는 결국 무대로 가지고 나갈 수 없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라이브는 어떠셨어요?

언어 때문에 많이 고생했습니다. 내가 가장 자신있는 언어가 일본어이고, 내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게일어로 노래하는 것이죠. 내 자신의 피때문인지 한국어로 노래를 할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걸 느끼고 한국리듬이 내 자신한테도 맞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한국어만으로 라이브 무대에 선다는건 어려운 일이죠. 


-한국어만으로 공연을 해야하는데, 일어로도 노래를 불렀다고 들었습니다. 관객들까지 함께 일어로 부르기까지 했다고 보도되었는데...

마지막에 앵콜곡을 부를 때 어쩌다가 우연히 일어가 나왔어요. 그 노래가 우연히도 관객과 함께 주거니 받거니 부르는 노래여서 관객들도 일어로 노래를 불러주었죠. 


-작년 12월에 남대문 메사에서 엄인호 씨와 함께 라이브를 하셨는데, 엄인호씨와는 언제 만남을 갖으셨습니까?

1997년 원코리아 페스티벌에서 만나 친목을 도모했습니다. 98년 5월 대학로 라이브에 초대받았고, 이를 계기로 공동앨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엄인호씨와 공동작업을 하신 ‘박보&엄인호/도키와 나가레루’앨범 작업은 얼마나 걸렸어요?

2년정도 걸렸고, 엄인호씨가 내 노래를 내가 엄인호씨의 노래를, 서로의 곡을 교환해서 불렀어요. 신촌블루스의 곡목길을 불렀죠. 엄인호씨가 아버지를 부르고.


-박보님 음악에는 한국적요소, 일본적 요소, 미국적 요소 모든 요소들이 섞여있는데, 어떤 음악을 지향하세요? 

일본것도 한국에서 들어왔으니, 제 음악의 뿌리는 한국이죠.


-‘Who can save the world?’는 환경문제를 염두에 두고 만드셨다고 보는데, 음악을 만드실 때 항상 메시지를 중심으로 만드시나요?

미국에서 록음악을 한다는 건 운동을 한다는 뜻입니다. 록은 바로 반체제적인 의미를 갖죠. 반전, 인종차별, 환경문제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록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세상은 온통 문제로 도배되어 있어요. 문제를 개선해서 다음 세대에 전해줘야죠. 그래야만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송창식씨 같은 경우엔 꾸준히 한국적인 걸 추구하는데, 음악적 목표는요?

서양음악과는 다른 록을 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세계는 한국에도 미국에도 아프리카에도heart beat라는 게 있잖아요. 심장으로부터 나오는 소리. 세계적 공통 리듬이라고 할 수 있죠. 이게 가장 중요한 거예요. 록을 하면 롤링 스톤즈, 지미 핸드릭스의 음악의 영향을 안 받는 사람은 없어요. 처음부터 그들의 음악이 머리속에 있죠. 전통은 할 수가 없어요.


-전통이 아니라면?

예전에 송창식씨가 그러더군요. 서양 음악으로 전통은 할 수 없다고. 저도 그래요. 전통은 어려서부터 익히고 배우는 거죠. 저도 그런 건 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아시아의 리듬과 분위기를 빌려서 아시아의 록을 하는 겁니다. 아시아적인 것을 현대적인 것으로 바꾸어 팝뮤직을 하고 싶어요. 보다 알기 쉬운 음악을요. 그 음악을 내가 즐기고 듣는 사람도 즐겨주면 만족하지요. 그게 아시아적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음악을 통해 인간과 지구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의 음악에는 한국적 전통과 록에 대한 열정이 어우러진뜨겁고도 흥겨운 가락이 녹아들어 있다. 그 가락에 실린 웅장하면서도 절제있는음성이 우리를 깨운다. 그런 그는 현재 영화화가 진행중인 양석일님의 ‘요루오 카케테’의음악을 담당하고 있다.  


-양석일의 소설 ‘밤을 걸고’대해선 어떤 감상을 가지고 계십니까?

소설 속 인물들은 재일한국인의 모습 바로 그겁니다. 제 아버지 얘기같이 느껴져요. 


-영화는 언제부터 시작되고  어떤 음악을 준비중이신지?

8월에 크랭크인에 들어갑니다. 군산에 세트를 만들어 전후 오사카의 분위기를살리고 있습니다. 

‘가제마카세’, ‘괜찮아요’, ‘고래사냥’,‘고개’와 사랑의 테마로 발라드 곡을 한곡, 템포가 발랄한 곡으로 ‘They can't take our dreams away’을 쓰고 있어요.


-‘요루오 카케테’의 등장인물들에겐 강인한 생활력과 생명력이 넘치는데, 그런 기질이 본인에게도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물론 있죠. 어릴 적에 저도 철을 주우러다닌 적이있고, 드럼 세트를 내 손으로 만들어 음악을 했죠. 소설 속 이야기가 제 안에 푹 절어들어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자동차 기름 냄새를 맡으며 해체작업을 했고 그 기름냄새를 좋아하던 시절도 있었구요. 그 땐 참 싫었는데 그런게 다 도움이 되었고, 좋은 경험이었어요. 


-한국민요를 부르시고 한국에서 라이브도 하시고 한국과 박보씨의 음악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걸 느낍니다. 아버지는 한국 분이시지만, 박보씨 어머닌 일본 분인데 왜 굳이 한국에 속해서 사시는 것인가요?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는 짤막한 한마디로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의 아버진 재일교포1세로 어렵게 일본에 와 오사카에 자리를잡았다. 군수공장, 해군선, 사탕공장, 자동차해체업 등 그 당시 재일교포들이 살았던 그 힘겨운 삶을 몸소 겪어내는 아버지를 보며 그는‘조선의 사람’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삶을 못본 척 할 수 없었다. 그 자신 또한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날들을 보냈다. 일본인 속에서 ‘박보’를 찾아헤매었으며, 재일코리언들 틈새에선 완전한 한국인이될 수 없는 답답함과 애석함에 고독을 맛보아야만 했다.


조선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일본학교에 다녔지만 동네 꼬마들과 한글과 김일성공부를 했어요. 아버지나 아저씨들 사이에선 박보였지만, 일본학교에 가면 일본사람처럼 살았죠. 일본인과 한국인 어느쪽이 되어도 이상하지않은 환경이었습니다. 스위치를 누르면 일본인, 또 한번 누르면 한국인 그런 거였죠. 


-일본과 한국의 중간지점에 서 계셨군요,

박보가 되고 싶은 시절이 있었는데, 조선사람 속에 들어가 보면 일본인이 되었고,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느꼈죠. 그래서 미국은 편했어요. 박보로 살 수 있었으니까요. 국적과 민족 등과 상관없이 황인종으로인정되었거든요. 


-요즘 재일교포 젊은이 중엔 일본사람으로 사는게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래서 박보님은 왜 한국인으로 사시는 길을 택했는가 궁금했어요.

저는 앞으로도 박보로 살고 싶어요. 재일교포 중엔 한국인이라고 고민하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무리해서 본명을 밝힐 필요는 없어요. 일본이름이건 한국이름이건 자기가 좋아하는 이름을 선택하고 살고싶은 길을 선택해서 살아갈 수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거죠. 귀화를 해야한다거나 차별이 있다는 건커다란 사회문제입니다. 한편으로 한국에선 교포 2세가 한국말을 못한다고 바보취급을 하곤하죠. 전 한국말은 못하지만 한국식 예절은 한국사람보다도 확실하게 배웠습니다. 일본에서 편하게만 살려고 꾀를 부렸다는 말도 들어요. 결코 그렇지 않아요. 1세는 어려운 시절을 살았어요. 보험이 없어서 병원에도 못갔어요. 저부터도 그래요. 우리 아버지도 자식이 병이나도 병원에 데려갈 수가 없었어요. 그런 중에도 1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학교를 세우고, 은행을 만들고, 이데올로기와는 관계없이 대단히 고생을 하셨고, 그렇게해서 생활을, 그리고 삶의 뿌리를 일본에 내려간 것입니다. 그런 강인한 생활력과 정신력을 본받았으면 하고, 제 어딘가에도 그런 면이 있을 겁니다. 


팔자니, 운명이니, 하는 말은 꼭 그걸 믿기 때문에 등장하는 말은 아닐게다.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일에 열중하고 흐르는 세월에 몸을 맡기고 여유롭게 사는 사람만이 입에올릴 수 있는 그런 말인 듯 느껴졌다. 수많은 인생경험이 빚어놓았을 때 비로소빛을 발하는 그런 단어가 아닐까. 털털한 웃음으로 참으로 솔직하고 담백하게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는 바삐 사라져 가는 그를 보며 재일코리언의 미래를 생각했다. 한국인임을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임을 인정하는 것,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훨씬 어렵고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말하려 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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