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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바람 Jan 04. 2023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

빛나는 사람보다 빛나게 하는 사람

대학 시절 연극반 동아리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사실 더 이전인 고등학생 때의 나는 지금 나의 직업과는 아주 동떨어진 꿈을 갖고 있었다. "PD" 단순한 PD가 아니라 올림픽 개막식 같은 대형 무대를 연출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을 선택하고 진학하는 과정에서 내 꿈과는 조금은 멀어지고 말았다. 대학 입학 후에 그 멀어지는 꿈을 끝내 보내고 싶지 않아 내 발로 연극반 동아리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시작한 연극반 동아리 생활은 1년 만에 다시 내 발로 걸어 나오면서 끝을 냈다. 두 번의 정기 공연과 한 차례의 동문 합동 공연을 마친 뒤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나의 능력과 외모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연기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정적으로 연기에는 재능도 관심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동아리 선배들은 한사코 나에게도 연기 연습을 시켰다. 그때마다 나는 무대와 조명을 설치하고, 음향을 만지며 다른 동기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연출부의 스태프 역할을 하고 싶고, 그것으로 난 만족한다고 힘주어 얘기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연기연습을 하는 날이면 동아리방에 가지 않고 도망 다녔다. 그러다가 공연 날짜가 잡히고 무대와 조명, 음향 등의 분야에서 손길이 필요하면 선배들에게서 간곡한 연락이 왔고 못 이기는 척하며 다시 복귀하곤 했다. 그렇게 했음에도 또 연기연습을 시키려고 하길래 쿨하게 그만두고 말았다. 


스태프 일이라는 게 그렇다. 자기만족과 사명감이 없으면 버티기가 힘들다. 그 어떤 공연도 스태프들의 모습은 무대에서 보이지 않는다. 잘 꾸며진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좋은 음향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연기자들이지 결코 스태프가 아니다. 그래서 스태프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사명감과 함께 잘 만들어진 무대와 적절한 조명과 음향 속에 배우들이 신나게 연기하는 것을 보며 자기만족을 느끼며 산다. 관객들의 커다란 박수와 찬사가 모두 배우를 향해도, 그래서 커튼콜이 계속 이어진다 해도, 그것이 모두 내가 만들어놓은 판 위에서 열심히 연기한 배우들의 몫으로 모두 돌아간다 해도, 그저 '별 탈 없이 잘 끝나서 다행이네.'라는 짧은 소회와 미소만 남기고 만족하며 돌아서는 것이 스태프의 일이다. 


스태프가 자신만의 사명과 전문성을 갖고 제대로 일을 하면 배우들은 물론 관객들도 아무 말이 없다. 극이 그저 부드럽게 잘 연결되며 이야기의 흐름을 타고 끝까지 잘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명 하나가 어긋나거나 효과음 하나가 잘못 나오면 순간 극장 안 모든 사람들의 몰입감이 확 깨지고 만다. 그리곤 어디선가 '뭐 이 따위 실수를 하고 그러냐?'. '기본이 안 돼 있네.', '음향이 왜 이래?'와 같은 수군거림이 이어진다. 배우는 당황하게 되고, 관객들은 어둠 속을 두리번거리며 두 눈으로 누군가를 찾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 사태를 일으킨 사람, 그 스태프가 누군가 하고 찾는 것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 순간이 스태프의 존재가 모든 이들에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세상에는 분명히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 드러나지 않게 뒤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다해내며 누군가를 빛나게 해주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를 빛나게 하기 위해 스스로 어두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어두운 곳에 있다 하여, 그들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하여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뒤편 어둑한 곳에서 일한다 하여 그들을 멸시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자기만족과 사명감으로 일을 완벽하게 해내려는 사람들에게, 무대 위에 오른 이가 빛나는 것을 보며 옅은 미소와 함께 자신의 전문성을 다시 확인하는 사람들에게 무례해서는 안된다. 이들의 존재는 자신들의 일을 잘 해낼 때에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없어지거나 그들이 손을 놓으면 그때서야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인식한다. 그들이 있기에 세상의 위대한 일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빛나는 사람과 함께 그를 빛나게 하는 사람도 기억해야 한다.

가장 짙은 어둠이 바탕이 되어야 빛은 가장 밝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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