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것에 즐거워하고 행복해지는 아이들을 꿈꾸며~
저 까짓게 뭐라고~
그랬다. 자유여행으로 스페인을 떠돌아 다니다가 마드리드의 어느 광장에서 만난 풍경이었다. 저 비눗방울이 대체 뭐라고~ 삐에로 복장을 한 어른이 아이들 하나가 다 들어갈 만큼의 큰 비눗방울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자 광장에 있던 아이들이 홀린 듯이 그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곤 이내 커다란 비눗방울을 향해 폴짝폴짝 뛰어오르기를 반복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해맑은 아이들의 미소가 어른들의 얼굴에도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까르르하는 웃음소리가 그리 넓지 않았던 광장을 가득 메워갔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아이들이야 으레 그러려니 했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아이들까지 함께 웃고 즐기는 모습이 무척이나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다. 2017년 1월 스페인에서 만난 이 풍경, 그리고 그 풍경을 담은 사진은 지금까지도 오래도록 나의 뇌리에 남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광장, 아니 놀이터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의 광장은 턱없이 부족하기도 하거니와 유럽의 광장들처럼 놀이와 음악, 카페 등 생활의 일부로서의 광장이 아니다. 더구나 아이들에게는 광장은 그런 의미로 잘 인식되지 않는다. 대신 우리에겐 놀이터가 있다. 최근에는 동네에 어린이 공원도 생기고 있어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어린이 놀이터에, 어린이 공원에 아이들이 별로 없다. 어린이 공원에는 비눗방울을 만들어주는 어른은 없고 부지런히 앞만 보고 걷는 운동하는 어른들이 많다. 가끔 아이들과 어린이 공원을 찾은 부모들도 대부분은 아이들이 다치지 않나 잘 살피고 있을 뿐이다.
안빈낙도, 안분지족?
학교 다닐 때 문학 시간에 참 많이 들은 단어들 중 안빈낙도(安貧樂道),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걸핏하면 시조를 통해 드러내었던 생각들을 한마디로 정리한 말들이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겨 지킴',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을 앎'이라고 사전에는 뜻풀이가 나와 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 가끔씩은 이런 생각도 했다. "양반이니까, 적어도 굶어 죽을 걱정은 없으니까, 그래도 먹고살 만하니까 안빈낙도, 안분지족을 말하는 것이지, 당장 생계에 큰 문제가 생기면 그런 얘기를 할 만한 여유가 생겼을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 말들의 핵심은 '가난이나 제 분수'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편안한 마음으로 만족할 줄 아는 능력'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조선 제일의 부자가 되기보다는 기본적인 생계만 된다면 조선에서 제일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갖춘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커서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이런 생각은 아이들을 키우는 어른들, 특히 부모들의 공통적인 생각이 아닐까 싶다. 문제는 디테일에 있다.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려면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줘야 할까?'라는 질문을 하면 그에 대한 답변에서부터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같은 아이라 하더라도 그 아이의 나이대에 따라 답이 확연히 달라지기도 한다. 가령 태어날 때는 "건강하게만 자라다오~"였던 것이 "키 성장 음식이나 약, 주사" 등을 거쳐 피아노, 태권도, 영어, 수학, 논술 등을 또다시 거쳐 의대입시준비반까지……. 이렇게 계속 가다 보면 결국 아이들은 편안이나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아이들이 행복하려면?
어른들은 무엇을 하든 아이들이 만족감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아갈 세상을 만들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 거칠고 혹독한 무한 경쟁이 만연한 세상 속으로 그 고운 아이들을 밀어 넣을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도 만족하며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다. 물론 무척 이상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바꾸어가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결코 아무것도 변화하는 것은 없을 것이고 외려 세상은 더 각박해져가기만 할 것이다. 세상은 냉혹한 곳이라며 그곳을 따뜻하게 변화시킬 고민도 하지 않은 채 그 냉혹한 곳으로 아이들이 그대로 걸어가게 하는 것은 방관이다.
아이들을 이 냉혹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전사로 만들어 싸우게 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 누구나 행복하게 만족감을 느끼며 살아갈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른들 스스로가 세상과 맞서 싸울 전사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것이 진정 아이들을 위한 길이다. 아이들에게 전사의 역할을 떠넘기지 말자.
어른들의 역할은 아이들을 공정이란 이름의 경쟁의 장에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행복하게 놀 수 있는 광장이 필요한 게 아닐까? 어른들부터 그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면 사는 태도를 갖추고, 또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예전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다고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만큼 행복해졌다고 할 수 있을까?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만큼 홀가분해져 있느냐에 따라 행복의 문이 열린다.” 법정 스님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