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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바람 Feb 21. 2022

느려야 보인다

슬로비디오가 느린 아름다움에 눈뜨게 하다


사진을 좋아하여 출사를 나갈 때면 대체로 자동차로 이동하게 된다.

여럿이 다니는 것보다는 주로 혼자 다니며 조용히 사진 찍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편이라 출사지로 갈 때는 어김없이 자동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운전하는 것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나는 운전하는 것도 좋아하여 기차나 버스보다는 자동차를 선호한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 내 마음대로 이곳저곳을 마구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풍경들을 만나는 것 또한 그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씩 아쉬움이 생길 때가 많다.

프레임에 담고 싶을 만큼 기가 막히는 풍경을 만났는데 그곳이 하필이면 도로 한복판이고, 뒤에는 다른 차가 따라오고 있고, 그래서 도저히 차를 세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그 풍경은 자연스럽게 그냥 지나칠 수밖에... 너무나도 아쉬운 순간들이다. 가끔씩은 여럿이 함께 이동하다가 그런 풍경을 만나는 경우도 있어 내가 운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수석에 앉아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기도 한다. 빠르게 지나칠 수밖에 없는 그 순간이 무척 아쉬웠다. 그래서 가끔씩은 조수석에 앉은 이에게 이런 말도 농담처럼 주워섬기기도 한다. "네가 운전 좀 해라. 나 촬영 좀 하게" ㅎㅎㅎ 이미 훌륭한 순간은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운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늘과 산과 강과 같은 거대한 풍경의 아름다움이야 그렇지만 꽃과 나비, 이슬, 나뭇잎 하나, 풀꽃, 빗방울, 눈송이.... 이런 작은 아름다움은 도저히 차를 타고서는 만날 수 없다. 빠른 속도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지나칠 수밖에 없으므로 그런 작은 아름다움을 만나려면 속도를 늦춰야 한다. 걸어야 하고, 그뿐 아니라 어떤 경우는 걸음조차 멈추어야 한다. 심지어는 우리 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것들은 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하고 숨을 참은 뒤 순간을 포착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휴대폰 기능 중에 슬로비디오 촬영 기능이 있다.

그저 휴대폰으로는 사진이나 조금 찍곤 했었는데 어느날인가 가만히 앉아 휴대폰 카메라 앱에 있는 여러 기능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게 되었다. 생각보다 여러 기능이 있었다. 아웃포커싱을 하는 기능부터, 자동으로 파노라마를 만들어주는 기능, 타임랩스, 슬로비디오, 그리고 수동 기능까지... 방 안에 앉아 이것저것 테스트를 해보니 생각보다 쓸 만한 것들이 있었다. 이전에는 DSLR 카메라로 찍고 후작업을 해야만 하는 것들이 휴대폰 안에서 모두 해결이 되기도 했다. 물론 사진을 확대해보면 화질이나 품질은 DSLR이 더 낫기는 하다. 하지만 DSLR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기능도 많았다.


며칠 뒤 비가 왔다.

작은 공터에 물이 고여 있었고 빗물들이 그 곳에 타닥타닥 내리고 있었다.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다가 얼마 전 이런저런 테스트를 했던 것이 떠올랐고 슬로비디오로 이 장면을 찍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실행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 글 처음에 올려둔 영상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슬로비디오가 보여준 빗방울의 모습은 마치 예전에 광고나 TV프로그램에서 보았던 그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슬로비디오를 작동한 것뿐이었는데 내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그 장면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었다. 매료되고 말았다. 슬로비디오가 보여주는 그 장면들은 작은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날 이후 비나 눈이 오거나 작은 계곡이나 폭포, 모래사장이나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등을 만나면 어김없이 슬로비디오를 찍게 되었다.


엊그제 동네 공원에 흩내리는 눈송이


빠름빠름의 시대이다.

이런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작은 것들을 많이 놓칠 수밖에 없다. 속도의 경쟁에서 뒤쳐진다는 것이 실패와 무능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번쯤은 생각해본다. 그 경쟁에서 맨 앞에 나선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며 그것이 과연 내가 생각하는 내 행복의 목표인지?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일은 시대가 만든 속도의 경쟁에 아무 목적이나 의미없이 그냥 따라가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아무 의미없이 마냥 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왠지 남들보다 뒤쳐져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때문에...  


느려야 보인다.

작은 행복도 느려야 보인다. 멈춰서 느긋하게 둘러보면 작은 아름다움은 그곳에 언제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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