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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옥 Jul 07. 2022

한라산엔 물 3병

한달살이 제주이야기 1. 한라산 백록담 첫 등반기

이런


앗 늦잠이다. 알람까지 먹어 버릴 정도로 깊은 잠을 잤나 보다.

제주 한달살이 대미를 장식할 한라산 등반이 이대로 무너지나 싶다가 번쩍 정신을 차려본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

애초에 7시 직행버스 182번을 타려 했으니 준비하고 탈 수 있는 버스가 7시 52분 출발, 8시 26분 성판악 도착이다. 산행 출발 예정 시간이 8시니 나쁘지 않다.

한라산 국립공원이 사전예약제로 탐방을 허락하는지 모르고 하루 전 접속하니 6~8시는 이미 만석이었고 8~10시에 딱 한자리가 남아 잽싸게 예약했더랬다. 한라산 정상 백록담 코스는 성판악에서 올라 관음사코스로 내려오는 것이 정설이라는데 성판악 주차장은 70여 대만 주차할 수 있다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대중교통을 알아봤다.

숙소가 있는 법환동에서 2km 정도인 서귀포 시외버스터미널 앞 까지 걸어가려고 5시 40분에 알람을 맞췄는데 늦잠이라니. 잠을 설치거나 날밤을 샐 망정 중요한 일정 앞두고 늦잠은 자본 적이 없는 터라 "이게 머슨일이고"라며 당황스러웠지만 다음 버스 시간에라도 맞추려면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잠시 '연기해? 포기해?'라는 기로에 섰지만, 둘 다 용납할 수 없다.

디지털 세상의 한라산 등반 고수들이 알려준 대로 물 2병, 점심으로 먹을 단팥빵과 사탕, 밤만쥬 등 단것을 가방에 넣고 세탁 후 비닐포장도 뜯지 않은 채 집에서 모셔온 등산화 챙겨 신고 서둘러 걸었다.

혼자 가는 길, 혹시나 싶어 어제 버스 타는 곳까지 답사까지 했던 준비성은 늦잠 한방에 날아가버리고 늦은 출발에 백록담은 볼 수 있으려나 걱정에 버스정류장까지 길이 멀다.

한두 명이라도 등산객이 보이려니 싶었는데 너무 늦은 건지 등산복 차림은 한 명도 없고 182번 버스는 이미 도착해 있다. 버스 시간을 잘못 알았나 싶어 냅다 뛰어 탔더니 기사님은 10분 후 출발한다며 내려버린다. 어이구 ㅜㅜ

서너 명의 젊은 사람들이 타고 10분 후 버스가 출발한다.

이만하면 늦잠을 만회한 듯 해 마음이 느긋해질 무렵 다음 정거장도 채 닿지 못한 버스에서 소리가 나고 갓길에 차를 세운 기사님이 내린다. 왠지 불안하다.

"냉각기가 고장 나서 더 못 갑니다. 손님은 어디 가세요?"

"저는 성판악까지 가는데 그럼 어떡해요?"

"다음 차 잡아 줄 테니 타고 가시겠어요?"

흐미 내 생전 고장 난 버스 타기는 또 처음이라 점점 백록담이 닿지 못할 곳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오늘 공무원 시험이 있다며 항의하는 젊은 여성과 제주여중 간다는 서너 명이 내리니 기사님은 "죄송하다"며 다음 차가 곧 오니 잡아주겠단다. 택시를 타고 갈까 고민 중인데 바로 다음 버스 281번이 도착하고 기사님들은 자주 있는 일인지 수월하게 손님을 인계받는다. 바꿔 탄 차는 완행버스. 예상시간 30분에서 얼마나 더 늦을지 모르겠다. 버스노선표를 보니 서귀포에서 제주공항까지 꽤 긴 노선이고 성판악은 중간 정도에 위치해 있다.

아, 멀다. 다시 내릴 수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 "오르고 오르다 못 오르면 다시 내려오면 되리라" 시조인지 타령인지를 읊조리며 창밖으로 눈을 던진다. 다음 정거장은 숙소 앞 서귀포여자중고등학교. 직행버스 타려고 뛰다시피 걸었던 길을 완행버스로 되짚어 온 꼴이다. 두 번째 으이구 ㅜㅜ

30~50여 명의 승객이 타고 내리는 동안 나 같은 지각 등산객은 한 명도 없다. 50분을 달린 버스에서 성판악에 내린 이는 달랑 나 혼자다. 시간은 오전 9시를 향해 질주한다.  

중간에 화장실도 없다니 아무리 급해도 화장실 다녀와 서둘러 입구로 향하니 지각생 서너 명에 한결 마음이 놓인다.

국립공원 한라산은 무료입장이다. 중간에 물을 파는 곳이나 매점이 전혀 없다. 2곳의 대피소를 지날 때마다 꼭 화장실을 들르라는 고수들의 당부가 넘친다.  

"지금 가도 백록담까지 갈 수 있나요?" 안내하는 분께 물으니 "정상까지 가시게요? 열심히 가보셔요"라며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낸다.

친절한 웃음을 뒤로하고 드디어 한라산 입산이다.

잘 정돈된 테크를 따라 조금 걸으니 해발 100m. 백록담 정상까지 1,850m 남았다.


오르다


짹짹, 찌익찌익, 휘리릭, 까악 까악, 구구 구구.... 참새, 직박구리, 섬휘파람새, 까마귀, 멧비둘기 소리 요란한 한라산 초입에는 테크가 정갈하게 깔려있다. 수년 전 한라산 영실코스를 수월하게 올랐던 터라 아직 한라산 등반이 만만했는지 이름표를 달고 선 서어나무, 섬개벚나무, 때죽나무, 분단나무들의 수려한 잎들과 작고 하얀 꽃들에게 바삐 인사를 건넨다.

예전에 쌀 씻을 때 사용했던 조리를 만드는 재료였다는 키 작은 대나뭇잎 같은 조릿대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제주 오름 어디서도 쉬이 볼 수 있었던 조릿대는 생장속도가 지나쳐 관리하는 인간 입장에서는 골칫거리지만 숲에 깃들인 생명들의 보금자리이고 다양한 숲을 이루는 밑거름이다.  

60대로 보이는 부부 등산객을 지나치고 중년 남자들 그룹을 제치니 숨이 헐떡인다.  멀찍이 뒤따라온 청년들에게 추월당하고 프랑스에서 왔는지 블링블링한 불어를 구사하는 여성 2명도 멀찌감치 앞서간다.

'지금 여기'를 표시하는 위치 표지판을 만날 때마다 '온 길'과 '갈 길'을 확인하며 다음 대피소까지 남은 거리에 희망을 건다. 걷는 만큼 거리가 줄어드니 내딛는 발만 믿을 밖에. 집에 두고 온 등산스틱 생각이 간절하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비교적 수월하다는 길을 따라 4.1km를 오르니 속밭대피소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햇빛을 피해 저마다 단것과 시원한 것들로 배를 채운다. 속밭까지 오르며 500ml 물한병을 거의 다 마셔버렸다. 이제부터 물을 아껴야 한다. 단것과 물로 짧은 휴식을 마치고 늦은 만큼 빠른 출발을 택했다.

"힘을 내! 곧 정상이야!" 최면을 걸어야 정상을 볼 수 있다.

이제부터 난코스가 예상된다. '손 씻는 물'이라는 팻말 옆에는 수도가 설치되어 있다. 화장실은 있으되 물이 나오지 않으니 이곳에서만 손을 씻을 수 있다.

다음 대피소인 진달래밭 대피소까지는 초록색으로 표시된 중간 강도의 코스이다. 중간에 사라오름이 표시된 것을 보니 이 시간에 하산하는 사람들은 사라오름을 다녀오는 것 같다.  

초록 코스로 들어서자 현무암이 난무한 산길이 제법 험하다. 성판악코스는 숲길로 관음사코스보다 완만하다는데 경치가 좋지만 길이 험하다는 관음사로 내려올지, 성판악으로 되짚어와야 할지는 좀 더 올라가 봐야겠다.

속밭에서 사라오름 입구까지 1.7km를 오르니 갈림길에서 사람들이 웅성 인다. 사라오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40여분 걸린다는 말에 젊은 커플은 과감히 사라오름으로 길을 잡는다. 이미 늦어버린 나는 미련 없이 다음 대피소인 진달래밭 대피소로 길을 잡았다. 두어 곳 평지에 평상과 의자를 두어 잠시 쉬어갈 수 있었지만 먼저 온 사람들로 빈자리가 없으니 패스하고 되는대로 다리 쉼을 해야 했다. 노란 길과 초록길에서 땀에 흠뻑 젖고 이미 물병 한통을 비워버렸다. 물 부족 사태가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다.

독일 청년들 한 무리가 지나치고, 얼추 같이 출발한 사람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1.5km를 올라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했다. 지난 1월 한라산 설경을 보여준 '나 혼자 산다'의 전현무 씨가 퍼져버린 대피소다. 백록담 정상까지 2.3km이고 빨간색의 난코스만 남았다. 가져간 간식을 먹고 두 번째 물병을 텄다. 점심거리인 단팥빵은 백록담 정상에서 먹기로 하고 다시 서두른다. 하산길을 생각하면 늦어도 오후 1시까지는 백록담을 봐야 한다.

친구들이나 모임에서 등산을 오면 한두 명은 뒤처지기 마련이다. 한 청년도 마지막 구간을 앞두고 "누가 한라산 오자고 했냐"며 친구들에게 원망을 쏟아낸다. 이쯤 왔으니 되돌아갈 수도 없고 나아갈 길만 남았으니 오도 가도 못하는 딱 그런 심정이리라.  

대피소에서 나와 데크가 듬성듬성 인 숲길을 벗어나니 한라산 등성이를 연결한 계단을 타고 있는 사람들이 훤히 보인다. 눈앞과 등 뒤로 구름덩어리들이 몰려가고 파란 하늘을 내어놓기도 하니 절경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맛이 산 맛이다.

 올봄 마트에서 사서 꽃 한 송이를 봤던 치자꽃과 닮았다. 곧 웃음이 터져 나올 듯 한 함박꽃

기후위기로 구상나무가 고사한다고 하더니 사진으로만 봤던 하얗게 고사된 구상나무가 선명하다.

어디선가 울리듯 나는 은은한 향에 끌려 두리번거리니 하얀 꽃이 흡사 치자꽃 같은 함박꽃이다.

데크와 현무암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니 정상이 코 앞이다. 오후 1시, 성판악-백록담 9.6km를 4시간 만에 올랐다. 백록담 정상 1,950m를 알리는 비석 앞 줄은 예상대로 길었고 곧장 백록담으로 향했다. 백록담을 사진에 담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뭄에 웅덩이만큼의 진흙탕 같은 물을 담고 있다. 한반도 남쪽에서 제일 높은 호수 백록담은 나를 포함한 사람들 등쌀에 그렇게 옹삭 한 풍경을 내어준다.  

"그냥 오름이네"라고 누군가 던진 한마디에 가뭄 타는 백록담에게 더 미안해진다.   

사진 찍기를 마친 사람들이 라면, 김밥 등 먹을거리들을 펼쳐놓고 식사 중이다. 나도 자리를 잡고 단팥빵을 집어 들었지만 헉! 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커피는 한 텀블러 있었지만 물이 없으니 빵도 커피도 무용지물이다. 허기가 크지는 않았지만 물 없이 내려갈 길이 까마득하다.

새로운 길 관음사는 포기하고 다시 성판악으로 내려가야겠다. 20여 년 전 지리산 종주길에서 겪었던 탈진 사태를 떠올리며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

"내려갈 때는 땀이 그리 나진 않을 테니 걱정 마"라고 위로하며 1시 30분 백록담을 뒤로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내리다

한라산 허리는 수많은 인간사를 매달고 있다. 기를 쓰고 올라 다시 내려오는... 인생을 배우러 그곳에 간다.  

오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서너 쌍의 부부팀 중 여성 한 명이 이제 막 계단길로 들어서는 것이 보인다. 일행은 이미 정상에 올랐을 텐데, 저분은 언제 오르려나 걱정스러웠지만 내가 남 걱정할 때인가? 정상에서 한두 모금 마신 탓에 남은 물이 바닥이니 잘 버티며 내려가야 한다.

어제 마트에서 산 장갑덕에 난간 역할을 하는 밧줄에 의지해 한 발 한 발 내려온다. 올라갈 때보다 무릎과 발목에 하중이 묵직하다.  현무암 투성이 산길은 잠시 딴생각하면 발목을 삐끗할 수 있다. 2018년 네팔 안나푸르나 4,000m 고지 ABC정상을 올랐던 등산화에 기대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딛는다.

'진달래밭 대피소'가 1차 목표다. 예닐곱의 직장인팀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남자들은 우르르 앞서 나가고 젊은 여성 한 명이 뒤떨어져 나와 다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려간다. 기다려주지 않는 동료들과 뒤쳐짐에 자존감이 상한 발걸음을 터덜터덜 떼어놓는 여성을 뒤로하고 "힘내세요" 라며 진심을 다해 응원한다.

초등학교 4학년쯤 보이는 남자아이는 겅충겅충 몇 계단을 뛰어내린다. 이모라 불리는 젊은 여성이 좋게 타이르지만 이내 넘어지고만 조카에게 소리를 지른다. 내려가는 길 종종 만난 아이는 여전히 뛰다 걷다, 쉬어간다.

진달래밭 대피소는 하산하는 사람들로 더 북적인다. 대충 그늘 아래 자리 잡고 등산화를 벗어 발바닥과 발목, 종아리를 마사지한다. 이제 1/4 내려왔다. 그래도 제일 난코스를 내려왔으니 좀 수월하지 않을까 싶다. 대피 소안에 혹시나 물을 구할 수 있어 들어가 보니 쉴 수 있는 의자들만 놓여있다.

한시라도 빨리 내려가자 싶어 신발끈 조여매고 속밭대피소까지 쭉 가볼 생각이다. 초록길에 희망을 걸고 걷는다. 아. 이 길이 초록길이라니...

올라갈 때 밤만쥬 몇 개 먹은 것이 다이니 열량 부족이 느껴진다. 허기가 지니, 어지럽다.  

시원한 맥주에 치킨이 아른거린다. 빨리 내려가서 시원한 맥주 한 사발 들이키리라.

추월하는 사람들에게 "   주실  있나요?"라고 애원하는 상상을 하며, 제발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길 바라며 사탕 한알을 입에 물었다. 내려갈 때는 땀을 많이 흘리지 않아서 인지 당이 몸속에 들어오니 기운이 도는  같다.  

속밭대피소까지만 가보자. 왠지 그곳에서 '물'이라는 글을 읽은 것 같다. '설마'와 '혹시'를 번갈아 떠올리며 부지런히 걷는 3km 남짓 초록길은 빨간 길처럼 더디고 힘들었다.

지금 속밭에 도착해도 4.1km를 더 가야 한다.


벌컥벌컥


속밭대피소에 도착하니 웬 줄이 길게 섰다. 줄 끝에 은색 자태를 뽐내는 수도가 번쩍 눈에 띈다. "아 여기 물이 있나 보다."

달려가 보니 오를 때 봤던 '손 씨는 물' 팻말이 선명하다.

젊은 여성이 물병에 물을 받더니 그 자리에서 들이킨다.

"벌컥벌컥"

손 씻는 물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나에게 그 여성은 그 어떤 삼다수 모델보다 더한 감동을 준다. 다음 젊은 남성도 바로 원샷. 내 앞의 서너 명은 손을 씻고 말았지만 2명의 젊은 남녀로 인해 이미 갈증이 반은 날아간 듯하다.

"나 같은 사람이 많았던 게야" 동병상련을 느끼며 물병에 물을 받아와 대피소 그늘로 들어와 마치 삼다수 인양 천천히 물을 마신다. 배가 좀 아프면 어떤가? 목마르고 배고픈 것보다 나을 테지. 해갈한 몸은 배고픔을 신호로 보냈고 그제사 단팥빵을 입에 문다.

아, 행복하다.

한결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시 신발끈 조여매고 나머지 4.1km 노란 길로 나섰다. 남은 시간은 1시간 40분. 마지막 코스니 힘을 내자.

'스슥, 스슥' 한참을 내려오는데 어디선가 소리가 난다. 바람소리인가 싶다가 반복적인 소리에 둘러보니 노루 한 마리가 보인다. "곰, 노루, 고라니, 뱀 등 야생동물에 유의하세요"라는 팻말을 본 듯도 하다.

야생동물들 공간에 끼어든 인간이니 최대한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한다. 오후 5시가 넘으니 숲길은 제법 어스름하다. 큰 산은 계절별 등산과 하산 시간이 정해져 있다. 하절기이니 그래도 이만하다.

해발 100m에 다다르니 더운 바람이 훅 불고 숲과 달리 밖은 훤하다.

"열심히 올라보셔요"라고 응원했던 입구를  나서니 지인들을 맞으러 나온 사람들이 저마다 아는 이들의 하산에 축하 박수를 보낸다. 그래 박수받을 만 하지... 대충 섞여 나오며 나도 그 박수를 받는다.

한라산 정상 백록담까지 왕복 9시간 30분.

버스시간을 보니 281번 버스가 곧 도착한다. 성판악 버스정류장을 향해 뛰다시피 걷는다.

어서 가서 맥주 한잔 하자.

나, 백록담 다녀온 여자거든!


<2022. 6. 18일 한라산 백록담 오르고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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