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여성농민운동가 이정옥
“상자 안 고구마는 씨앗, 상자는 밭두둑, 상자를 뒤덮은 잎, 상자에 고구마 일생이 담겼네요.”
‘행복한고구마’ 상자 감상평이 ‘구슬 서 말 꿰어내듯’ 술술이다. 고구마 창고 지으러 들른 디자이너는 상자만 보고도 이정옥 대표의 마음을 꿰뚫는다.
“그러고 보니 박스에 그려진 고구마잎으로 고구마밭이 온전하게 표현된 작품이 되었네요. 상자 속 고구마가 두둑 속 고구마였던 거예요!”
이정옥 대표 머릿속에 와글거리며 떠돌던 단어들이 ‘고구마 일생’ 한 문장으로 정리되니 역시 전문가 안목은 다르구나 싶다.
‘행복한고구마’는 이정옥 대표의 일생이다.
자작 3만 평, 소작 6만 평 등 총 9만 평의 무안 황토 땅에 남편 김용주 씨와 유기농 고구마를 심고, 가꾸고, 캐고, 판매하는 이정옥 대표는 여성농민운동사史와 유기농고구마史에 있어서 자타공인 ‘최초’와 ‘처음’이다.
전국여성농민운동총연합(이하 전여농) 초대회장, 무농약 고구마 1호, 고구마 유기농 인증 1호가 이정옥 대표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다. ‘여성농민운동가이면서 유기농 농사꾼’으로 인정받을 때가 가장 좋다는 ‘행복한고구마’ 대표 이정옥은 개척자다.
무안은 양파, 마늘, 고구마, 배추, 무, 고추 등 특용작물을 재배하는 농가가 많다.
일제강점기 물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농지개량조합이 농민 위에 군림하며 횡포를 부리자 농민들은 조합비를 부당 세금으로 부르며 수세를 거부했다. 부당 세금은 갑류농지세인 수세에 그치지 않고 특용작물로 분류된 밭작물에도 을류농지세를 부과했다.
농경사회에서 논과 밭이 부의 상징이었는지 몰라도 산업화를 거치면서 농촌과 농업은 도시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싼 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값싼 농산물이 필요했고, 땀 흘려 지은 농산물 가격은 제값 받기 어려웠다. 대량생산을 위한 비료와 농약, 농기계 사용료를 메꾸기도 어려워 농가부채로 시름겨운 농민들이 늘어갔다. 게다가 논농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과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심은 밭작물에 갑류, 을류 서열까지 매겨 세금을 붙이니 농민들의 불만이 목전까지 차고 넘쳤다. 수입농산물은 쏟아져 들어오지, 농산물 가격은 폭락하지, 농사를 지을수록 떼어가는 세금은 늘고 빛만 늘어나니 젊은이들은 탈농 하여 값싼 임금노동자로 도시 한켠으로 밀려났다.
1983년 전남 무안군 현경면 용정리 1구에 부과된 을류농지세 납부고지서를 받아 든 농민들은 농지세가 과다하게 인상되자 면사무소를 찾아간다. 담당 공무원이 기간이 지났다며 이의신청을 받지 않자 용정리 주민들은 을류농지세를 내지 않고 버티기로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청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한 사람 한 사람씩 을류농지세를 냈지만, 주민 한 명이 105,000원의 세금을 내지 않고 버텼다. 그랬더니 담당 공무원이 을류농지세를 67,500원으로 깎고 가산세 10%를 추가하여 74,250원으로 수정한 고지서를 발급했다. 세금이 공무원 마음대로 ‘줄었다, 늘었다’ 하는 것을 본 주민은 끝까지 세금 납부를 거부했다.
큰딸 은오가 태어난 1979년은 정옥 씨가 농민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을류농지세 거부운동이 일어난 해이다. 마늘, 양파, 고추, 담배 등 특용작물에 부과된 을류농지세 납부 거부운동이 무안에서도 시작됐다. 무안군 현경면 용정리 1구 새터 마을에서도 기독교농민회 청년회 활동을 하던 용정교회 청년회가 을류농지세의 부당성에 대해 교육했다. 마을 사람들은 을류농지세 거부운동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 두려워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세금을 깎아 주겠다”며 납부를 회유하자 그냥 내자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마지막까지 버틴 사람은 관청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다. 텔레비전에 차압 딱지를 붙이며 겁을 주기도 했고 회유와 협박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을 끝까지 버틴 사람은 다름 아닌 정옥 씨 친정아버지였다. 농민운동하는 남편이 조금 못마땅했던 정옥 씨는 친정아버지가 부당 농지세의 당사자가 되자 자연스레 농민운동 곁으로 한 발짝 다가선다.
친정집 텔레비전에 차압 딱지를 붙여 가져 갔다가 다시 가져오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군청 세무계장이 마을에 와서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막상 자리가 마련되니 마을 사람들은 인사만 나눌 뿐 을류농지세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켜보다 답답한 정옥 씨가 한마디 했다. “부당한 을류농지세로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이간질하고 일제 때처럼 차압 붙여 물건을 가져가는 행위는 농민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오? 사과하러 오셨으면 얼른 사과하시오!”
사과하러 온 담당자인 세정계장은 다름 아닌 남편 김용주의 사촌 형으로 제수씨의 저돌적인 말에 그만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무안군이 친인척 관계인 공무원을 마을로 보내 입장이 곤란해진 마을 사람들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었지만 정옥 씨의 당당한 사과 요구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기에 충분했다.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배종렬 전국기독교농민회장은 공무원들이 돌아가자 “오늘 아무도 말을 못 했으면 우세 살 뻔했는데 이정옥 씨가 똑 부러지게 따져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정옥 씨를 ‘열 남자 안 부러운 여자’라고 추켜세웠다.
‘열 남자 안 부러운 정옥 씨’를 발굴한 배종렬 회장의 추천으로 정옥 씨는 아이를 둘러업고 1980년 1월 이화여대에서 열린 여성교육에 참여한다. 이화여대에서의 교육은 정옥 씨 생각을 바꿔놓았다.
“미국이 준 밀가루는 다람쥐 꽃신이더라니까! 밀가루에 길들여 신발 없이 살 수 없게 만든 것을 알고 나니 화가 나더라고” 유신 교육의 수혜자였던 정옥 씨는 그동안 우방으로만 알고 있었던 미국의 실체를 알아버렸다. 김진주, 김상희 씨 등 교육을 준비하고 참여한 모든 사람의 환대와 존중, 배려 속에 진행된 교육은 정옥 씨에게 ‘인간대접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주었다.
이후 여성농민회 조직 활동을 하면서도 교육 시간만큼은 ‘여성농민’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애썼다. 교육을 마치고 서로 준비해온 밥 한 끼를 나누면 동지애가 절로 생겼다.
1970년대부터 농민운동을 해온 남편을 말리지는 않았지만 무언가를 반대하는 운동방식이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던 정옥 씨는 교육을 받고 난 후 적극적인 농민운동가가 된다.
“내가 본래 말을 잘 들어. 교육을 받았응께 알려야 된다고 생각한 거야. 숙제 안 하면 마음이 불편한 것처럼 농민운동, 여성운동은 꼭 해야 하는 일이 되었지”
달라진 정옥 씨는 을류농지세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아이 둘러업고 달력 뒷장 찢어 만든 차트 옆구리에 끼고 마을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여성농민들을 만났다.
아는 것을 나누니 힘은 들어도 신이 났다.
1988년 1월부터 농민들에게도 의료보험증이 발급됐다. 의료보험료 고지서를 받고 보니 재벌그룹 회장보다 농민들에게 부과된 보험료가 2배 이상 높았다. 의료보험료 액수만 보면 농민들이 재벌 부럽지 않다는 자조 섞인 농담이 떠다녔다.
정부 보조금이 공무원은 50%, 농민은 25%로 반토막인 반면, 땅·집·농기계 등 온갖 재산과 식구 수까지 더하니 농민들에게 부과된 의료보험은 여느 직장인, 여느 재벌보다 높을 수밖에 없었다. 사회보장제도는 부유층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둬 사회적 약자에게 보장이 가닿도록 하는 소득 재분배와 경제적 평등이 목적임에도 오히려 농민들에게는 부당한 세금만 추가된 셈이었다.
정옥 씨는 부당한 농어민 의료보험제도 시행 초기에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도가 굳어지면 되돌리기 어렵다. 마음이 급하니 기획, 교육, 조직, 홍보, 투쟁까지 여성농민들이 일사천리로 해나갔다.
1988년 1월 22일 무안 유월리를 시작으로 용정, 수양촌 등 5개 마을, 2개 교회에서 의료보험 교육을 실시했고 부녀회 중심으로 마을별로 「의료보험거부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마을별 대책위원회는 자체적으로 면사무소와 군 의료보험조합에 ‘의료보험료 납부고지서’를 반납했다. 2월 전남 무안군 몽탄면, 현경면, 운남면, 해제면 등의 여성농민 17명은 「무안군 의료보험여성대책위」를 조직하고 1988년 2월 10일 무안 시장 공터에서 「현행 의료보험제도 개선을 위한 무안 여성농민대회」를 개최했다.
A부터 Z까지 여성농민들 스스로 조직하고, 준비하고, 치르는 첫 투쟁이었다. 대회장 주변은 아침 일찍부터 경찰들로 둘러싸였다. 무안 여성농민 2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11시부터 시작한 ‘무안 여성농민대회’는 대회사, 경과보고, 농어촌 의료보험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에 대한 강연, 현장의 소리, 성명서 발표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서 여성농민들은 국가부담금을 늘려 농민 실정에 맞는 의료보험료 책정과 의료보험 통합, 진료기관과 지역의 재설정 등을 요구하며 의료보험료 강제징수에 맞서 끝까지 납부 거부 투쟁을 이어갈 것을 선언했다. 행사를 마친 여성농민들이 노래를 부르며 사거리에서 군청까지 행진하자 경찰들이 막아섰다. “그럼 자리에 앉아서 연좌농성합시다”는 정옥 씨 제안에 여성농민들이 ‘선’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까 경찰 쪽에서 협상이 들어 오대. 그래서 사복경찰들까지 물러가면 연좌를 풀겠다고 했더니 싹 빠져 불드만”
정옥 씨와 여성농민들의 사기는 높아졌고 그 길로 의료보험 조합으로 가서 한 명씩 의료보험 고지서를 반납하고 해산했다. 무안 여성농민들이 시작한 의료보험 투쟁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1989년 2월 임시국회에서 ‘통합의료보험법안’이 통과된다.
정옥 씨는 데모하다 경찰에 막히면 “도로에 앉읍시다”며 여성농민들을 자리에 앉힌다. 그리 격렬해 보이지도, 힘들여 싸우는 것 같지도 앉지만 성과가 큰 투쟁이 연좌농성이다. 연세 지긋한 엄마뻘 여성농민들이 “아이고 다리도 아프고 앙거서 지둘릴라요”하고 앉아버리면 ‘끌어낼 수도, 그냥 둘 수도 없는’ 경찰들에게는 고약한 투쟁이다.
한 번은 수양촌 여성농민운동가 고송자 씨가 고구마밭에서 일하던 정옥 씨를 급히 호출한다. “아마도 서울에 농민대회가 있어서 마을 여성들과 함께 가려고 하는데 경찰이 길목을 막고 있었나 봐. 봉고차 한 대 몰고 어디로 오라는 거야” 정옥 씨 덕(?)에 여성농민운동에 들어선 고송자 씨 호출에 호미 던지고 달려가 경찰에게 발 묶인 여성농민들을 태우고 무안공항을 한 바퀴 돌아 함평천지 휴게소까지 냅다 달렸다. 농민대회를 위해 상경하는 차량을 고속도로 입구마다 경찰이 막아서자 정옥 씨는 “내립시다. 연좌합시다”며 상행선 고속도로 전차선을 막아버렸다. 경찰은 공무집행 방해라며 협박했지만 “이것이 농민들 공무고, 공무는 당신들이 막고 있다”라고 외려 호통쳤다. 여성농민 십여 명이 도로를 막고 앉으니 길이 막혀 성이 날 만도 한 운전자들은 되려 “잘하요”, “기다릴 테니 끝까지 해보씨요”라며 응원을 보낸다. 급기야 경찰 헬기까지 뜨고 늘어선 차량이 길어지니 경찰은 마지못해 길을 터준다. 정옥 씨의 연좌농성이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수양촌에서 고추 싣고 현경 농협에 데모하러 갈라는디, 정옥이 니가 사회 좀 봐야 쓰것다.”
1988년 고추값이 800원까지 떨어지자, 고춧대에 매달린 채 말라버린 고추들이 떨어져 밭은 붉게 물들고 농민들 속은 까맣게 탔다. 고추는 겨우내 모종 키워, 봄에 심어, 여름내 따고 말려, 가을에 판매하니 1년 내내 여성농민들이 손타고 애태워가며 키워낸다. 고추 팔아 아이들 학교도 보내고 농약값, 비료값 내야 하는데 한 해 농사 망치게 되었으니 책임지라고 수양촌 여성농민들이 고추 싣고 처음으로 데모하러 가는 날이었다.
당시 고추 수매 가격이 800원이었다. 고추값이 끝없이 추락한 원인은 정부의 고추 수입이 원인이었다. 고추값이 몇 년 동안 오르락내리락 요동쳐도 대책 하나 내놓지 않던 정부는 농산물 흉작이 되면 ‘보상’보다 농산물 ‘수입’에 열을 올렸다.
고추는 집에서 먹을 만큼만 농사짓는 정옥 씨는 그날도 십여 명 놉을 얻어 마늘밭을 매던 참이었다. “내가 농민운동하자고 먼저 꼬셨응게 어쩌것어? 농협으로 달려가서 수양촌 고송자 언니랑 마을 여성들의 첫 집회 사회를 봤지”
이날 집회 후 12월 5일부터 한 달여간 벌어진 무안 고추 투쟁은 ‘전량 수매’라는 승리를 거뒀지만, 투쟁 기간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농민회원 농민 장례식을 앞두고 경찰이 백골단을 투입했다. 주로 집회 사회를 맡았던 정옥 씨가 주동자로 찍히면서 경찰이 ‘저년, 이놈’을 지목하고 들이닥쳐 정옥 씨 부부 등 무안 농민회원 22명을 광주 서부경찰서로 연행한다.
“경찰이 부부 있으면 나오라고 하데, 우리 부부가 나서니 유치장 하나를 배정해 주더라고” 서부경찰서의 배려(?)로 유치장에서 부부 독방을 배정받았지만, 같이 연행된 농민회원들이 “아따 여기 넓고 좋구만”이라며 너스레 떨며 들어와 버려서 ‘부부 독방’ 차지는 무산되고 말았다. “연행자를 석방하라”는 농민회원들의 투쟁으로 연행자들은 다음날 모두 풀려났다.
1984년 해남읍교회에서 열린 교육에서 강사와 교육생으로 만난 두 사람은 후에 걸출한 여성농민운동가로 성장한다.
“고송자 언니네 마을 사는 청년 농민운동가 박진우 씨가 의식도 좋고 여간 좋은 사람이 있어 교육에 보내겠다고 하는 거야. 큰 재목이 될 거라면서”
1980년 초부터 기독교농민회 활동을 하고 있던 정옥 씨는 옆 마을에서 해남까지 교육받으러 온 고송자 언니가 반가웠고 고송자 언니는 야무진 말솜씨를 가진 농민운동 선배 정옥 씨가 부러웠다.
‘열 남자 부럽지 않은 여자’와 ‘큰 재목이 될 여자’들은 무안이 아닌 해남에서 그렇게 만나 사십여 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무안여성농업인센터를 만들고, 일구며 여성농민으로 살아간다. 마을을 지키는 ‘고목나무’ 같은 ‘거목’들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서슬 퍼렇던 군사독재정권 시절 농민운동의 싹을 틔우고, 자주적 농민운동으로 진화할 수 있었던 바탕은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였다.
이정옥과 김용주가 만나 사랑을 꽃피웠던 용정 교회는 기독교장로회 소속이었고 자연스럽게 기독교농민회 활동가가 되었다.
이정옥은 을류농지세 투쟁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면서 1984년 1월 18일 전남여성농민회준비위원회 준비위원장을 맡고 기독교농민회 여성농민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된다.
1985년 소몰이 투쟁 이후 지역사회에서 인간관계로 얽혀있던 남성들과 달리 현장에서 비타협적인 투쟁을 경험한 여성농민들은 ‘여성농민들을 교육하고 조직하는 언어와 방식이 다르고 같은 농민문제라도 여성농민이 겪는 문제가 다르다’는 젠더 감수성에 기반해 여성농민 독자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여성농민회는 농민운동을 더욱 풍성하고 힘 있게 만드는 조직활동이라고 생각하면서 독자 조직을 준비했지만 남성 운동가 중심의 농민운동 진영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기독교농민회는 1984년 12월 1일 여성농민위원회를 만들고 이정옥 씨가 위원장에 선출되자 ‘분파주의’ 논쟁이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토론 자리를 마련했다.
기독교농민회 여성농민위원회 회원과 여성농민활동가들을 포함한 12명의 여성농민운동가와 남성 농민 지도자 4명은 ‘기독교여성농민위원회의 위상’을 주제로 1985년 1월 24일 경기도 부천 소래읍 소재 「작은자리 교육원」에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인다.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 머리에 두른 정옥 씨는 “을류농지세, 부당수세, 수입농산물 반대투쟁 등을 통해 여성들이 투쟁을 대하는 태도와 생각이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성조직은 여성들의 감성과 욕구를 끌어내 농민운동조직을 더 강고하게 만들 수 있다”며 이제는 여성농민이 남성과 투쟁의 뒷바라지가 아닌 투쟁의 주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의료보험투쟁과 고추 싸움은 여성농민 독자조직 논의의 시작이자 출발이었다. 당시 농민운동을 이끌던 남자들의 관심 밖이었던 사안들을 여성농민의 힘으로 승리로 이끈 정옥 씨는 여성농민도 앞장설 수 있다는 자신감과 스스로 농민운동을 일구고 싶은 의지가 샘솟았다.
“농민운동이 남녀로 나눠지는 것은 세력이 약화될 수 있다”며 “농민회 조직 안에 여성의 위상을 강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 농민회 남성 지도자들이 급기야 “학생운동 출신 여성농민운동가들이 저런 생각을 심어줘서 저런다. 기지도 못하면서 뛰려고 한다”고 비난하자 정옥 씨는 여성농민 투쟁의 경험을 무기로 설득했다.
“농민운동이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 속에 여자들의 능력과 역할의 한계를 짓고, 그 틀에 여자들을 맞춰 넣으려 한다. 이제부터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결정하고, 여성농민들에게 더 많은 교육을 통해 조직역량을 강화하겠다”라고 한편으론 설득하고 한편으론 선언했다.
“왜 여성농민 조직을 만드는 것이 분파주의인지 나는 정말 모르겠더라고”
정옥 씨가 독자적 여성농민조직의 필요성으로 꼽은 첫 번째 이유는 여성농민들이 겪는 ‘이중고’다. 여성들은 일단 아이 업고 집에서 탈출하는 것 자체가 투쟁이다. 농민과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이중고는 여성농민들의 발목을 잡았다.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지만 시어머니 눈치 보며 아이 업고 무안에서 안동까지, 전국을 다녀 본 정옥 씨는 남성 농민운동가들의 ‘분파주의’라는 낙인은 ‘당사자성’이 빠진 주장으로 들렸다.
무안은 여성농민회 조직 초기에 학생 출신 여성농민 운동가가 없었기 때문에 현장 출신 여성농민운동가인 정옥 씨의 말과 경험에 힘이 실렸다.
여성농민운동은 ‘생활밀착형 운동’이라는 점이 독자적 조직의 두 번째 이유였다. “남자들은 의료보험문제를 처음에는 투쟁으로 연결하지 않더라고. 의료보험은 생활밀착형 차별이거든. 왜 공무원과 농민들 지원이 다르고 사회적 약자인 농민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지 불평등을 피부로 느끼니까 여성농민들이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거지”
이정옥은 1988년 무안군 의료보험 여성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같은 해 기독교농민회 조직 안에 여성농민들의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여성농민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장을 맡았다.
무안 의료보험 투쟁과 고추 투쟁은 전국여성농민 조직화에 경험과 힘으로 쌓였다.
‘이중고와 생활밀착형 여성농민 운동론’으로 정옥 씨는 ‘분파주의’라는 공격에 맞섰다.
현장 여성농민운동가의 말에는 힘이 실렸지만 1989년 12월 18일 전국여성농민위원회를 띄우기까지 전국 농민운동 진영의 ‘분파주의’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농민 이정옥은 깃발을 들면 절대 물러서거나, 지지 않았다.
오랜 논의와 격론 끝에 1989년 12월 18일 전국여성농민회위원회(이하 전여농)가 창립한다.
대전 가톨릭 농민회관에서 열린 역사적인 결성식에는 전국 9개 도, 50여 개 시군 여성농민대표 200여 명이 모였다. 결성선언문이 낭독되고 이정옥은 전여농 초대회장에 선출된다. 전여농의 결성은 당시 진행되던 우루과이라운드를 통한 수입개방을 앞두고 불안해하던 여성농민들이 힘을 모으는 구심점이 되었다. 사회적으로도 여성농민이라는 새로운 동력이 밑에서부터 올라옴을 의미했다. 시민사회단체뿐만 아니라 정치권과 해외에서도 축하 메시지가 답지했다. 35세의 젊은 여성농민 이정옥 회장의 어깨는 무거웠지만 가슴은 벅찼다.
1기 전여농은 조직 강화에 힘을 실었다. 여성농민 대중 속에 뿌리내린 여성농민 자주적 조직기반을 만드는 것이 절실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거부’, ‘농산물 제값 받기’라는 농민투쟁에 여성농민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참여가 전여농 조직화로 이어지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여전히 밖으로 나도는(?) 며느리를 단속하는 시어머니, 남편과의 투쟁이 일상이었고 농민대회라도 갈라치면 가족들 눈을 피해 도망치듯 집을 나와야 하는 형편이었다. 농산물 수입개방 전면 자유화라는 시대적 과제에 전여농은 여성농민 교육과 조직화, 그리고 일상화된 거리투쟁을 통해 조직을 꾸려갔다.
교육과 투쟁, 농사와 가사로 이정옥 회장은 분신술이라도 해야 할 지경이었지만 꿈꿔왔던 여성농민에 의한, 여성농민의 조직을 단단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지칠 틈이 없었다. 이정옥 회장에게는 앎이 곧 실천이었다.
1990년 4월 24일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 결성으로 전여농과의 조직적 관계에 대한 논의는 이정옥 회장 재임기간 내내 주요 의제였다.
전여농은 ‘마을부터 전국까지’라는 조직적 과제를 내걸고 여성농민 건강교실, 농가부채 현황조사 등 생활밀착형 과제를 안고 수입개방 반대, 농산물 제값 받기 거리투쟁에 나서야 했다. 투쟁현장의 이중고는 여전히 숙제였다.
24세에 결혼하면서 시작한 농사일은 농민운동을 하면서도, 전여농 회장을 하면서도 소홀할 수 없었다. 사람과 자연에게 덜 해로운 농사를 짓는 것도 농민운동의 사명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유기농업은 1980년대 인식도 기술이나 장비도 지금에 비하면 열악했다. 연구와 실험이 일상이니 경험과 노하우가 수천 년 동안 축적된 관행농에 비해 몇 배 힘들었다. 아내, 며느리, 엄마라는 3중고에 여성농민 리더까지 더해졌지만, 농사를 소홀히 하면 도로아미타불이다.
을류농지세, 의료보험투쟁, 마늘투쟁, 고추투쟁 등 벌이는 투쟁마다 승리의 계단을 밟았고 전여농 조직까지 만들자 칭찬과 격려가 쏟아졌다. 사회를 보고, 연대사를 하고, 토론을 하며 마이크 잡을 일이 많았던 터라, 이정옥 회장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었다.
많은 사람의 기대와 칭찬의 말속에 하루는 “저렇게 돌아댕기면서 농사는 언제 짓는당가?”하는 소리가 군중 속에서 튀어나왔고 이정옥 회장 귀에 천둥소리처럼 꽂힌다.
“농사꾼은 농사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새삼 사무치듯 다가온다.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농사로 설득하고 싶었다. 한 작목이라도 유기농으로 성공하는 농사꾼, 그것 또한 농민운동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이정옥 회장은 남편이 70년대 말부터 꾸준히 씨 뿌려온 ‘유기농 고구마 전문가로 성공하자’고 마음먹는다.
1989~1991년까지 전여농 회장 임기를 마친 이정옥과 무안군 농민회장을 마친 김용주 ‘회장 부부’는 10여 년을 유기농업 연구에 매달린 끝에 고구마에 관한 한 자타공인 프로 농사꾼이 된다. 선정 조건이 까다롭다는 신지식인에 부부가 모두 선정되었고 남편은 유기농업과 고구마 종자 분야에, 아내는 농산물 유통과 마케팅 분야의 기술을 인정받았다.
‘농민운동 그만두고 농사만 짓는다’는 애꿎은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이정옥 회장에겐 고구마밭이 농민운동 현장이었다.
미뤄두었던 숙제를 하듯 일에 매달렸지만, 몸과 마음은 편했다. 유기농 고구마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고구마는 본래 유기농 아니었나요?”라고 되물었다. 이정옥 회장이 1995년 품질관리원에 유기농 고구마를 등록하려고 하니 고구마는 품목에 없단다. 퇴비부터 병해충 잡기까지 건강하고 맛있는 고구마 생산을 위한 과정을 해당 부처 담당관에서 설명하고, 설득한 끝에 1998년 ‘고구마 유기등록증 1호’로 선정된다.
어린 정옥에게 아버지는 ‘땀사구’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심부름을 보내면 오가는 길 들에 핀 꽃과 쟁기 갈던 소도 들여다보고, 하늘과 바람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땅 내음을 맡느라 바빴던 어린 정옥은 심부름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다. 큰딸을 애지중지 어여삐 여긴 아버지는 심부름을 시키자마자 “지금 오냐?”는 농으로 ‘늦지 말기’를 예습시켜 보지만 대체로 ‘땀사구’이지 않은 적이 없다. ‘땀사구 없다’는 관심 두는 게 있으면 다른 건 돌아보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전라도 사투리다. 길을 걷다가도 꽃을 보면 쭈그려 앉아 ‘예쁘다’ 말을 걸어야 하니 부부가 함께 가는 교회에 늦기 일쑤였다. 결혼식에도 늦은 정옥 씨는 초지일관 ‘땀사구’다.
1955년생 정옥 씨는 2녀 1남의 장녀다. 위로 언니가 한 명 있었는데 체한 것을 모르고 치료시기를 놓쳐 3살 되던 해에 죽었다. 그 후 태어난 어린 정옥은 조금만 체해도 엄마 등에 업혀 체 내리는 사람에게 달려가 치료를 받았다. 어린 시절 몸이 약한 탓에 첫 번째 딸을 잃은 부모는 애지중지 모든 사랑을 쏟았다. 정미소를 하던 아버지 사업이 그리 잘되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중학교 가던 해 정옥은 목포로 유학 간다.
목포여중, 제일여고 등 목포에서 알아주는 명문학교를 다녔지만 교대 진학을 원했던 부모님 바람을 이뤄드리지 못했다. 아버지는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박순천 여사를 봐라. 여자라고 못 할 일이 없다. 다 할 수 있다”라고 정옥을 북돋웠다. 아버지의 교육열과 여성에 대한 개방적인 인식이 부담되기도 했지만, 정옥의 자존감은 한없이 높아갔다.
박정희 정권 시절 중고등학교에서 유신 교육을 받은 정옥이 집으로 오면 김대중 지지자였던 아버지와 이념 논쟁이 벌어지곤 했다. 열 내서 아버지를 설득하는 딸과의 논쟁을 아버지는 즐겼다. ‘땀사구’ 딸이 어느새 커서 아버지와 대거리를 하니 한편 기특했을 것이다.
농민운동을 하는 딸과 사위를 자랑스러워한 아버지는 농민운동 이야기 듣기를 즐기셨다.
엄마는 강직한 분이셨다. “8살쯤,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고모랑 나무하러 갔다가 고모가 밭둑에 심어진 호박 한 덩이를 따왔는데 엄마가 보자마자 꼭 그 자리에 갔다 놓으라며 우리 둘을 쫓아 보내는 거야. 도둑질한 음식을 먹일 수 없다"며 제자리에 갖다 놓을 것을 명령한 엄마의 불호령에 어린 정옥과 고모는 다시 먼 길을 돌아 호박을 제자리에 놓고 오느라 언덕배기를 한참 헤매야했다. 다른 사람 것을 탐내는 것은 무서운 범죄라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아온 정옥 씨는 결혼해서도 그릇 하나를 깨도 굳이 시어머니에게 알려 혼쭐이 나곤 했다. 혼자 알면 끝날 일인데 ‘속인다’는 사실이 내내 마음 불편했다. 눈물 쏙 빠지게 혼나고도 밥이 끓는 정도 시간이면 다시 마음이 고요해졌다고 하니, 엄격했던 엄마의 교육 덕인 듯하다.
“두근 거리며 혼날 준비할 때는 힘들었지만 다 말하고 나면 정말 홀가분했어. 오히려 자유로워지더라고. 아주 사소한 일도 가슴에 두지 않았어.”
자애로운 아버지와 엄격했던 엄마는 사람을 좋아했다. 사거리에 위치한 친정집은 동네 사랑방이었다. 아버지가 “이리 오소, 한잔하소”하고 부르면 엄마는 음식을 차려냈다. 사람 좋아하고 음식상 푸짐하게 차려내는 정옥 씨의 큰 손은 부모님을 똑 닮았다.
7살 때 아버지가 생선 덕자를 새끼줄에 끼워 3.5km 거리의 할아버지 댁에 갖다 드리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1.5km 정도는 아버지가 함께 갔지만 나머지 길과 돌아오는 3.5km를 더해 총 5km의 심부름도 혼자 척척 해냈다. “할아버지 집에 갔더니 긴장이 풀려서 피곤이 몰려오더니 잠시 잤나 봐. 할아버지가 밥 먹여 보내려고 불렀더니 이미 가고 없더래” 정옥 씨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큰 병어였던 ‘덕자’를 들고 할아버지 집을 오가던 모습이 흑백 필름처럼 흐른다.
영성이 맑았던 아버지는 직장암으로 2년 동안 투병하실 때도 밝으셨다. 64세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엄마에게 수시로 미안하다고 하셨고 모두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죽음은 가족 모두에게 편안했고 쉼표 같았다.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잠깐의 이별 같은 쉼표. 아버지가 주신 사랑과 맑은 영성은 정옥 씨가 어려운 고비를 맞을 때마다 튼실한 동아줄이었다.
‘땀사구’ 정옥 씨는 여전히 현재를 충실히 산다. 자줏빛 고구마꽃에 말을 걸고, 붉은 고구마 숭어리를 들고 “너 참 잘생겼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붉은 황토의 향기를 맡고, 떠오르는 해와 빨간 석양을 마중하면 하루하루가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땀사구’는 아버지의 유산이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3년이 못 되었을 때, 정옥은 엄마의 편지를 받는다.
“시집가면 평생 같이 살지 못할 텐데 보고 싶으니 내려와서 엄마랑 살자”는 간곡한 부탁이 담긴 편지였다.
서울 생활에 크게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정옥은 두말없이 1977년 8월 무안 고향으로 내려온다. 몇 주 지나고 무료해지자 정옥은 어린 시절 다녔던 주일학교를 떠올리며 “교회나 가볼까?” 싶었다. 목포에서 중고등학교 다닐 때 고모할머니 권유로 교회를 다녀서 진즉 마음은 있었으나 오랜만에 교회에 가려니 쑥스러웠다.
망설이던 정옥은 “지난주 교회에 갔던 사람처럼 가보자” 마음먹고 나서니 길에서 만난 교인들도 ‘지난주에 온 사람’처럼 반갑게 맞는다.
“주일학교에 오라”며 권하는 교인들에게 “교회만 조용히 다닐게요”라고 했지만, 첫날 전도사님 말씀에 반한 정옥은 새벽기도까지 챙기며 교회에 빠져든다.
“곧 제대한다지?” “12월에 용주 형 오면 이것저것 해보자” “아, 용주 형 빨리 오면 좋겠다” 교회 청년들은 모였다 하면 겨울에 제대한다는 청년 김용주에 대한 이야기가 끝이 없다. 초등학교 마치고 고향을 떠난 정옥은 실루엣만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용주 형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더니 어느새 마음까지 살짝 설렌다.
그가 제대하고 처음 교회 문을 열고 나타난 날 쏟아진 햇빛 탓일까? 용주 형 아우라에 빛이 퍼진다. 후광이다.
“들어오는 순간, 그 사람을 쳐다보는데 내게 뭔 일이 있을라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
정옥의 감정은 단순한 설렘이 아닌 용주 형과의 미래가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좋은 느낌 한켠에 간단치 않을 미래가 그려지는 것은 왜였을까?
두 달쯤 되자 정옥은 ‘용주 형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보지?”
겨울 농촌은 한가했다. 교회처럼 연애하기 좋은 곳이 있을까? 남녀 청년들은 이 집 저 집 사랑방으로 놀러 다녔다. 하루는 미경이네서 옥자네로 가면서 정옥이 용주 형에게 “형, 나는 옥자네로 갈라네” 대놓고 언질을 준 뒤 과연 용주 형이 내 말을 알아먹었을지 가슴을 콩닥거리며 기다렸다. 용주 형이 옥자네 사랑방에 10분 만에 나타나는 바람에 두 사람의 썸은 짧고 싱겁게 끝나버렸다.
시골 청춘남녀의 연애는 의외로 로맨틱하다. 자연이 더해지니 말이다.
교회 청년연합회 모임으로 4km 넘게 떨어진 곳으로 20여 명이 이동하면 정옥과 용주 형은 달빛 따라 손을 ‘잡았다 놓았다’ 숨바꼭질 같은 달빛 데이트를 즐겼다. 달님이 랜턴 노릇을 한 셈이다. 하루는 정옥의 집에 모여 노는데 마침 정전이 됐다. 그 틈을 타서 용주 형은 정옥의 손을 꽉 잡았고 그 손은 크고 듬직했다. 달빛 데이트보다 더 짜릿한 정전 데이트 라니...
연애가 깊어지면서 불안하고 두려움도 커갔다. 정옥은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할지 걱정이 컸다. “이 사람을 배신하면 안 될 것 같았어. 결혼 앞에 큰 파고가 올 것 같아 두렵지만, 사랑보다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더 크더라고”
9남매에 홀어머니를 모시는 가난한 농사꾼 용주 형과의 결혼을 부모님은 당연히 반대했다.
1978년 4월 임신한 정옥과 용주 형은 서울로 도망갔고 그해 11월 아이 낳으러 용주 형네 집으로 내려왔다. 아이만 낳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농사일을 하면서 세상 밝게 웃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정옥은 고향 땅에서 농부로 살기로 마음먹는다.
첫 딸 은오를 낳고 1년 반 만에 친정에 들른 정옥은 마르고 백발이 성성해 십 년 먼저 늙어버린 아버지 앞에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용주 형을 받아들인 아버지는 사위를 아들처럼 아끼셨다.
17살부터 농민운동을 한 모태 신앙인 용주 씨는 단단하고 수줍음 많은 농촌 청년이었다. 교회에서 청년 기독교농민회 활동을 시작한 용주 씨는 군대에서 영성체험을 한다.
“기도하는데 늘 봤던 풍경이 갑자기 너무 아름다웠어요” 군대처럼 살풍경이 있을까? 유신 서슬 퍼렇던 1970년대 군대니 오죽했을까 싶은데 기도의 힘은 달랐다. 기도 끝에 내 몸 밖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임사체험을 하면서 ‘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낀 용주 씨는 그때부터 자신감이 붙었다.
“수줍음이 많아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도 어려웠는데 영성체험 이후 자신감을 얻어 연애도 할 수 있었어요. 그전의 나였으면 여자와 손잡고 이야기하는 짓은 못했을 거예요. 하하”
그러고 보니 부부의 중매쟁이는 하느님이다.
농촌활동 온 대학생들과도 이야기가 통하니 농민운동도 신이 났다.
목소리 좋은 용주 씨 노래는 기타 솜씨와 곁들여 일품이다. 교회에서 찬양할 때면 더 빛났다. 신앙과 농민운동을 하나로 받아들인 용주 씨는 청년연합회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농촌 청년 리더로 성장했다.
결혼 후 용주 씨는 농사지으면서 광주로 목공을 배우러 다녔다. 1980년 5월 19일 살벌했던 광주 상황으로 북동성당에서 열릴 ‘함평고구마투쟁 1주년 기념대회’가 급히 취소되었다. 기념대회 참석하고 목공학교 수료증 받으러 광주로 길을 나선 용주 씨는 기념대회가 취소되자 양동시장에 있는 목공학교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미 광주는 군인들에 의해 통제되었고 쇠 곤봉을 든 군인에 의해 누구든 머리가 깨져도 이상하지 않은 살풍경이었다. 용주 씨 가방에는 기독교농민회 간부가 맡긴 자료가 있었다. 군인들에게 들키면 불온서적 소지자로 찍혀 잡혀갈 것이 뻔했다. 버스는 금남로까지 밖에 운행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니 정류장에 아이 손잡고 있던 젊은 엄마를 군인이 곤봉으로 때리자 용주 씨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젊은 엄마가 내 또래였나 봐. 용주 씨가 마치 내가 군인한테 맞는 것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고 하더라고”
“저 새끼 잡아라”고 용주 씨가 소리치며 군인에게 뛰어가자 근방에 있던 광주시민들도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바로 무장한 군인들에게 쫓겨 가게로 뛰어들었지만, 겁에 질린 가게 주인은 용주 씨를 밀어냈다.
무차별 곤봉 세례를 안긴 군인들은 피투성이가 된 용주 씨와 여기저기 얻어터져 피로 곤죽이 된 광주시민들을 속옷만 입힌 채 트럭에 싣고 31사단으로 이송했다. 5월 광주항쟁 기념일이 다가오면 속옷만 입은 피투성이 청년의 두 다리를 군인들이 질질 끌고 가던 TV에 비친 모습 그대로였다. 피투성이인 채로 의사와 만난 용주 씨가 끙끙 앓기만 할 뿐 아무 소리도 내지 않자 의사는 아플 텐데 소리라도 치라며 안타까워했다. 의사는 용주 씨를 ‘전신 타박상’ 소견으로 광주 통합병원에 입원시켰다.
의사 덕분에 치료도 받고 기록도 남아 1997년 12월 17일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광주항쟁 부상자협의회는 보상금으로 주택조합을 만들어 금호 연립주택 한 동을 지었다. 용주 씨도 부상자 12등급으로 분류되어 연립주택 한 채를 받았다. 몇 년 후 부부는 당시 집을 팔아 마련한 6천만 원을 농민운동가, 민주화 운동가 10여 명에게 나눈다. “우리는 살 만하니까 더 어렵게 살면서 운동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더라고” 그제야 부부는 광주의 쓰린 기억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행여나 집값이 오를까?” 쓰이던 신경도, 도시로 향할지도 모를 마음도, 완벽히 차단하고 부부는 오직 농사만 남겼다.
“유기 농사에서 굼벵이를 어떻게 죽이는 줄 아요?” 굼벵이는 농사짓는 이들에게 천적이다. 상품의 등급을 달리하고 수입과 직결되기 때문에 굼벵이를 잡는 농약이 물론 따로 있다. 그러나 유기 농사는 천적을 이용한다.
“일기예보에 영하 5℃ 이하라고 뜨면 새벽같이 밭에 나가서 땅을 갈아엎어버려. 땅속의 굼벵이가 다시 땅속으로 가는 데는 느려 터져서 시간이 걸리니까 결국 얼어 죽어버리제”
굼벵이 천적은 영하 5℃의 추운 날씨다.
진딧물은 월남 고추 우린 물과 쌀뜨물을 이용하거나 천적인 무당벌레 등으로 방제한다. 바람결에 비 오는지 알아차리고, 흙냄새에 작물 심을 날을 받을 줄 알아야 진짜 농사꾼이다.
부부는 해마다 재배포장에 새로운 황토를 넣고 멸치액젓에서 추출한 부산물에 쌀겨, 깻묵, 숯 등 천연자재만을 사용한 유기질 퇴비로 건강한 땅을 만들었다.
멸치액젓 슬러지는 ‘행복한고구마’ 농장의 특별한 퇴비다. 유기 순환농법을 하고 싶었지만 축산업을 하지 않아 마땅한 양분이 없던 차에 우연히 구하게 된 멸치액젓 슬러지에 왕겨를 섞어 발효시켰다. 악취가 나던 시기를 거치니 어느 날 신선한 슬러지에서 구수한 향이 나는 것을 보고 황토를 넣어보자 싶었다. 1년 정도 발효시키니 하얀 곰팡이가 핀 흙 누룩이 되었다.
‘행복한고구마’ 농장에 ‘고구마연구소’를 만든 부부는 고구마에 대해 연구하고 개발하고, 활용하기를 반복하며 최상의 고구마를 생산해 낸다. 용주 씨는 2011년 전라남도로부터 ‘유기농 명인’ 인증을 받았다.
정옥 씨는 오늘에 충실한 ‘꿈꾸는 농부’다. 밭으로 가는 길가에 핀 나리꽃이 자리 잡았는지 살피고 황칠나무, 수국들 에게도 인사를 건넨다. 손으로는 삐죽이 올라오는 바랭이 풀을 뽑아내고 발로는 뜯어놓은 검불을 걷어내며 온몸의 오감을 열어젖힌다.
같이 길을 걷는 이는 한 곳을 보고 속도를 내지 않아 속 터질 일이지만 정옥 씨의 영혼은 이미 밭 한가운데다.
정옥 씨의 오지랖과 상상력은 ‘행복한고구마’의 원천이다. 고구마 숭어리를 캐다가도 체험 프로그램을 굴리고, 고구마 데이 음악회 그림을 그린다. 3년 만에 여는 음악회니 더 근사해야 한다.
햇빛, 달빛, 별빛이 키우고 나는 조금 거든 것뿐이라는 꿈 꾸는 농부 정옥 씨와 고구마 명인 용주 씨가 만들어 낸 고구마가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2022년 1월 말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행복한고구마’ 사무실은 겨울 햇살 가득 담은 카페 같았다.
어느새 농장 일원이 된 큰딸 은오 씨는 세 살배기 아들을 어르고 달래며 3년 묵힌 효소 히비스커스를 내놓는다. 빨간 차 히비스커스와 샛노란 군고구마가 냄새와 비주얼로 침샘을 자극한다.
10년 넘도록 백화점과 친환경 매장 판매 1순위를 놓치지 않고 홈페이지 직거래 8,000여 명이 찾는 고구마는 역시 달고 찰졌다. 판매되고 있는 고구마 중 달수 고구마는 “이렇게 달수가?”에서 따왔다니 작명 센스도 만점이다.
재작년 편의점에서 내놓은 겨울 상품 군고구마가 대박 나면서 삭막한 도시의 겨울을 구수하게 달구었다는 이야기를 기사로만 접했는데 얼린 군고구마 실물을 영접하는 순간이다. 게다가 유기농 고구마계의 BTS ‘행복한고구마’라니...
30여 년 동안 유기농 고구마를 싹 틔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새터 농장에서 2007년 바다를 품은 지금의 곡지 ‘행복한고구마’ 농장에서의 15년까지 45년은 이정옥, 김용주 고구마 명인과 유기농 고구마의 역사이다.
농사를 참말로 좋아했던 천상 농민 남편 용주 씨가 있었기에 가능하기도 했지만 꿈꾸는 농부 정옥 씨 없이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결혼한 지 사십 년이 넘은 이 부부의 호칭은 처음처럼, 정옥 씨와 용주 씨다. 평등하고 친근한 부름이다.
‘행복한 고구마’ 총괄이사 이정옥.
정옥 씨가 내민 명함 속 직함은 과거이자 현재이고 미래다.
부모님의 사랑과 총애를 듬뿍 받은 딸에서 용감한 결혼을 이뤄낸 용주 씨 아내로, 세 아이 엄마로, 며느리로, 여성농민운동가로, 유기농 농부로 살아낸 세월이 압축된 명함 한 장은 정옥 씨의 증명사진 같다.
1985년 남편 용주 씨가 유기농사를 시작했을 때 “저 큰 밭을 농약 없이 어찌 김매고, 벌레 잡을 꺼나?” 걱정이 사무쳤지만 용주 씨가 트랙터로 밭을 가는 동안 정옥 씨는 경운기로 퇴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내가 고구마를 참 좋아했어” 엄마는 어린 정옥이 맛나게 먹는 것을 보려고 조금 일찍 고구마를 수확해서 제일 먼저 쪄주면서 “너 고구마 먹는 거 보고 자파서”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기독교농민회에서 진행한 유기농업 교육에서 포도냐, 고구마냐를 놓고 고민할 때도 정옥 씨가 좋아하는 고구마가 일 순위였다. 물론 무안의 황토와 해풍은 더할 나위 없는 선택 요소였다.
기독교농민회에서 알게 된 장성 한마음공동체 남상도 목사님이 건네준 ‘수’라는 고구마 품종을 만나 1만 평, 2만 평의 대규모 농사를 지으며 성공과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수’는 병충해에 강하고 모양과 색이 잘 나와 이후 전국 고구마 계를 석권했다. 고구마 명인 부부의 역할이 컸다.
2003년 농업에 경영을 접목해 생산한 농산물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과정을 공부하면서 정옥 씨는 2004년 벤처 대학 3기생 중에서 최우수 학생상을 받을 만큼 공부에 진심이었다.
“공부하는 농부가 난 참 좋더라고” 자신의 농장을 마케팅해보라는 숙제를 받아 들고 며칠 밤을 새워 낸 과제는 70여 명 벤처 대학 학생들의 연구사례가 되었다. “세상에 숙제를 나만 해 온 거야. 덕분에 김동신 교수님이 새터 농장 사례 70부를 복사해서 다 나눠주고 새터 농장을 벤처 농업으로 만드는 과정을 모두가 연구한 거지”
코카콜라와 스타벅스처럼 내 상품에 이름을 지어보라는 강의를 듣고 나서 어느 날 고구마밭을 매던 정옥 씨는 불룩하게 올라온 땅을 손으로 헤집어 보니 진분홍빛 고구마가 “아, 행복해”하는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더란다. 입에 붙지도 않는 어려운 단어만 머릿속에 맴돌다가 고구마 숭어리에 딸려 나온 고구마들에게 ‘행복한고구마’라고 이름을 붙여보니 입에도 붙고 말하는 순간 행복해져 버렸다.
시중가보다 2배 이상 높은 가격대에도 수년간 충성도 높은 소비자를 보유한 ‘행복한 고구마’ 브랜드는 고구마밭이 작명소다. 먹거리에 ‘맛있는’이 아닌 ‘행복한’이라는 형용사를 구사한 것을 보면 소싯적 이정옥 대표는 문학소녀였던 것이 틀림없다.
2007년 인근 고구마 생산 농가까지 참여한 ‘(유)행복한고구마’ 법인을 설립하는 등 규모화를 이뤘다. 2011년부터는 고구마 첫 수확을 기념하며 ‘코로나19’ 이전인 2018년까지 고구마축제를 열었다. 고구마 농사 틈틈이 찍어둔 2만 여장의 황토벽돌과 너와 지붕을 얹은 황토집에서 음악회를 열고 농장에서 생산한 고구마, 배추, 무, 양배추 등의 농산물로 건강한 먹거리를 차려냈다. 붉은 고구마 숭어리 같이 생긴 8월 18일이 고구마 day이고, 축제일이다.
‘행복한고구마’ 회원과 대도시 소비자 등 연간 1천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고구마 체험행사는 농촌과 유기농업에 대한 공감과 도시와 농촌의 상생을 위한 시공간이다.
‘행복한고구마’의 미래를 묻는 사람들에게 이정옥 대표는 수치가 아닌 ‘식탁에 둘러앉은 12명’이라고 표현한다. 숫자 12는 농사 공동체를 꿈꾸는 정옥 씨에게 꽉 찬 숫자다.
‘코로나19’ 이전에는 12명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기도 했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큰딸과 아들 내외, 그리고 여동생 정희 씨와 서너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채운다. 산업화 이후 도시로 빠져나간 젊은이들이 돌아올 길 난망한 농촌인력은 가족이나 외국인 노동자들로 근근이 채워진다. ‘행복한고구마’도 농촌 현실을 비껴가지 못한다.
도시로 나갔던 아이들이 돌아와 엄마, 아빠가 일군 농장을 잇겠다고 하니 고된 농업노동에 얼마나 힘들까 걱정되지만 든든함과 위로가 더 크다.
2019년 창고를 짓고 이제 건물 짓는 것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가지 계획이 더 섰다. ‘행복한고구마’ 소비자들이 현장에 와서 농사철학과 농사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고구마 명품 카페’ 만들기다. 도시와 농촌, 생산자와 소비자의 왁자지껄한 소통을 통해 농사와 먹거리, 농촌과 농업이 모두의 ‘먹고사는’ 문제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예전에 농민운동과 유기농 운동 2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한 인도 기자가 우리 농장에 왔었어. 기분이 참 좋더라고” 1박 2일 일정으로 이정옥 대표 집에 온 인도 기자는 2박 3일을 머물며 충만한 표정으로 돌아간 뒤에도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다.
농민운동하는 유기농 농민 이정옥의 이력서가 한없이 사랑스럽다.
“고구마 숭어리를 들어보면 크고 작은 알갱이들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낸 거야. 서로에게 어깨를 걸으니 자잘한 고구마도 살아남았던 거고”
인간의 손에서 상품과 못난이로 구분되어 팔려나가고 버려지기 전까지 고구마들의 연대는 굳건하다. 고구마 숭어리를 통해 이정옥 회장은 연대와 소통을 이야기한다.
“전여농 초기에는 조직이 단순해서 그런지 정강도, 운동 방향도 단순했던 것 같아. 여성농민회 깃발 아래 모이면 됐는데, 지금은 여성농민 깃발보다 당의 주장과 색깔이 먼저 보여서 좀 아쉬워”
부당 수세와 농지세, 의료보험, 고추, 양파, 마늘, 소 등 수입 농축산물 반대 투쟁 등 농민들이 싸워서 제자리로 혹은 제도개선을 이뤄낸 승리의 경험은 지금도 농민운동, 여성농민운동이 더 크고 힘이 센 조직으로 성장해야 하는 이유다.
‘행복한고구마’의 본질은 농민운동이다. ‘행복한고구마’는 내 브랜드를 구현한 것에 그치지 않고 지속 가능한 농업을 지향한다. 이정옥 회장은 한번 구매한 소비자가 재구매할 수 있도록 좋은 농산물 생산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9만 평의 농사를 짓는 ‘행복한고구마’가 9만 명의 소비자를 가지면 가격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다는 것이 이정옥 회장의 생각이다. 소비자에게 인정받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진짜 농사꾼이 되는 것도 농민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두가 규모화, 전문화될 수는 없다. 정부의 농업정책의 방향과 질이 매우 중요하다.
농민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이 농산물 가격 문제다. 이정옥 회장은 젊은 시절 “농민들이 매달 1백만 원이라도 정기적으로 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농민들은 1년에 두 번 수확철을 빼고는 일 년 내내 돈에 쪼들리며 빚쟁이로 산다. 전여농 ‘언니네텃밭’처럼 책임 있는 직거래 시스템을 가지면 좋겠지만 모든 농민에게 혜택이 돌아가려면 정부 정책이 되어야 한다.
‘행복한고구마’는 그런 사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9만 평 정도의 규모화를 이루니 시장에서 가격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다. ‘행복한고구마’도 처음에는 천 평, 이천 평, 배수로 늘어나다가 3-4만 평이 되니 후배들이 생기고, 그들과 유통업체를 나눴다. ‘행복한고구마’의 성공으로 유기농 고구마 후배 그룹이 생겼고 또다시 각자 거래하는 유통업체가 생기면서 결과적으로 유기농 고구마 유통업체도 늘었다. 생산자 주도로 파이를 키워냈다.
‘행복한고구마’라고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확이 많아 가격이 내려간 해는 1~2천 원 내리면 잘 팔리겠지만 ‘행복한고구마’가 시장 가격의 지렛대 역할을 하다 보니, 마음대로 가격을 내릴 수도 없다.
“지역마다 특산품을 조사하고 특산품을 보호하는 정책이 있어야 하는데 어느 정부고 농업정책이 없어서 문제”라는 이정옥 회장은 정부가 고구마, 마늘, 양파 등 작물별 데이터라도 제공해 주길 바란다.
농업도 계획이 서고 가격이 안정되어야 농사짓고 싶은 젊은이들의 농촌으로 돌아올 수 있다.
농업은 여전히 가격정책이 핵심이다.
“전여농 초대회장으로 뿌듯함도 부끄러움도 있어요.”
젊은 시절 여성농민에게 들씌워진 이중고·삼중고의 억압에도 숨 쉴 틈을 만들어 준 여성농민운동은 이정옥 회장에게 현재 진행형이다.
“조용히 동지들을 도우면서 운동가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는 이정옥 회장은 설립부터 현재까지 참여하는 무안여성농업인센터가 여성농민의 권익과 복지를 향상하는 기관으로 우뚝 서길 바란다.
“무안은 여성농민회가 위탁운영하는데 무안 여성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대중적인 공간이더라고. 농민 숫자가 점점 줄어드니 여성농민운동도 지역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하는데 여성농업인센터를 통해 지역 실정에 맞는 여성농민 의제를 설정하고 교육하고 조직하면서 시대에 맞는 여성농민운동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여성농업인센터가 100% 대안은 아니고 평가는 각자 다를 수 있지만 이정옥 회장은 무안여성농업인센터를 하드웨어 삼아 여성농민들의 이해와 요구에 맡는 소프트웨어들로 채워나갈 생각이다. 전여농과 꾸러미 사업을 하고 한글교실, 영어교실, 인문학교실, 농사교육, 취미교실 등을 운영한다. “꾸러미 사업이 운동으로 진화하기까지는 시간과 품이 더 필요해 보인다”는 이정옥 회장은 조급해하지 말라고 한다.
노인 여성농민들에게 평생 한이라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것이다. 무안여성농업인센터에서 가장 의미 있고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역시 한글교실이다.
아직 세상을 바꿀 일이 너무도 많은 농촌, 이정옥 회장은 농촌 현장에서 길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땀사구의 곡식정원
‘행복한고구마’를 일구면서 정옥 씨의 영성은 더 깊어졌다. 나아가기 위한 뒷걸음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믿었던 사람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겪으면서 나에게 문제가 있나 싶어, 한동안 괴로웠던 정옥 씨는 그 기간을 “나 홀로 광야에 나갔다”고 표현한다.
깊게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을 했더니 사랑스러운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단다.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니, 순간순간, 고비고비 고민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나’와 마주한 정옥 씨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현실로 돌아와서 남편과 가족들에게 선언한다. “이제부터 내가 CEO 할라네”
본인만 모르고 인정하지 않았을 뿐 이미 ‘행복한고구마’ CEO는 정옥 씨라는 남편 용주 씨 말마따나 정옥 씨는 여지껏 ‘땀사구’다. 온통 돌아 돌아 자기 자리를 찾아내는 지각쟁이 ‘땀사구’ 말이다.
유기농사지으면서 외국으로 선진지 견학을 다니면서 많이 배웠지만 2011년 영국 스코틀랜드 핀드혼 영성수련원에서의 체험은 정옥 씨를 다시 한번 흔들어 놓았다.
자연과의 소통, 힐링센터 그리고 노래와 춤, 유기농 먹거리와 생태적인 삶을 꾸리는 영성공동체를 위해 더 연대하고 배울 참이다.
앞으로는 바다를 품고 뒤로는 고구마밭과 산을 배경 삼은 곡지 농장은 땀사구 이정옥의 ‘곡식 정원’ 실현지다.
핑크뮬리, 아이리스, 작약, 장미, 문그로우, 자작나무, 편백, 수국, 돈나무, 황칠나무, 노루오줌 등 각종 허브와 나무들이 농장 곳곳에 자리 잡았다. 산책길 내내 “이 꽃은 뭐예요? 저 나무는요? 저 풀은요?”라고 물어도 막힘없는 대답이 척척 돌아온다.
꽃과 나무가 곡식과 어우러져 한바탕 피고 지고, 떠나고, 남겨지는 세상살이를 이곳 곡지에 펼쳐보려 한다.
곡식정원사 이정옥은 귀하게 피어나는 고구마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