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가 살던 곳은 신림동 청기와 집이었다. 아직 어려 청기와가 뭔지도 모르면서 어른들이 어디 사냐고 물어보거나, 짜장면을 배달시킬 때면 oo 번지라는 주소 대신 그냥 ‘청기와 집’이라고 하면 대충 통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곳은 물리적 공간을 넘어 관계의 의미를 알게 해 준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어느 날, 학교를 파하고 집 대문을 들어서려는데 웬 아이가 뒤에서 나를 부른다. “니가 바로 청기와집 아들이구나. 학교에서부터 따라오는 내내 누군가 했다” 며 자기는 2층 집 주택에 새로 이사 온 K라고 했다. 붙임성 좋은 그는 나중에 아래층에 사는 T까지 연결해 주어 우리 셋은 곧 친해지게 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다람쥐처럼 2층 K네 집에서 놀다가는 1층 T네 집으로 내려와 헤어지곤 했다. 그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그렇듯, 우리도 “한번 삼총사는 영원한 삼총사”를 외치며 평생 같이 살다 같은 날 죽자며 만화 삼국지를 흉내 내어 함께 웃었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너른 공터가 있어서 다른 아이들과 ‘짬뽕’, ‘다방구’를 하며 해지는 줄 모르고 놀았는데 저녁밥 때가 되면 엄마들이 자식들 찾으러 오는 곳도 으레 그곳이었다. 코밑에 수염이 돋아 날 즈음에는, K가 자기 집 장롱에서 발견했다는 펜트하우스를 숨죽여 돌려보던 곳도 바로 그 공터 한켠이었다.
어느 날, 그곳에 난데없이 ‘OO 연립’이라는 새 건물이 들어서게 되자 우리들의 아지트는 빼앗기게 되었다. ‘입주민 외 출입금지’ 팻말과 함께 높은 담이 세워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수시로 월담하여 그 잘난 OO 연립 아이들과 대거리를 하였다. 누구 한 명이 맞으면 나머지 둘이 몰려가 앙갚음을 해주는 것으로 세 친구의 의리를 돈독히 다졌다.
그렇게 콩깍지의 콩처럼 늘 함께 붙어 다니던 우리는 제일 먼저 T가 이사를 가고, 우리 집도 곧 떠나게 되자 신림동에는 K만 홀로 남게 되었다. 그래도 대학생이 되면서 종종 만나게 되면서부터는 우리의 술자리는 언제나 터줏대감 K가 지키는 신림 사거리였다.
그러던 것이 각자가 던적스러운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결혼도 하여 점차 먹고사는 일에 바빠지게 되면서 어느 해부터인지 우리는 명절에나 겨우 만나게 되었고, 그것도 신림동이 아닌 서로의 중간지점이 약속 장소가 되어 버렸다. 그마저 T가 지방으로 내려가면서부터 우리는 꽤 오랫동안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몇 년 전 불현듯 K로부터 한통의 연락을 받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설암 판정을 받아 그동안 병원에 입원했었다... 답답한데 오랜만에 부산 가서 T 얼굴이나 보자...”
그것이 K와의 마지막 기차여행이었다. 장례식 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남은 T와는 소소한 안부는 주고받아도 웬일인지 둘이 따로 보자는 이야기는 쉽게 꺼내지지가 않는다. '인마들아, 이번 추석에는 신림동에서 함 봐야지'라고 K가 예전처럼 걸걸한 목소리로 먼저 전화해 올 것 만 같기 때문이다. 세발 달린 솥단지에서 다리 하나가 사라지니 두발로는 서지 못하게 되었나 보다.
언젠가 혼자서라도 옛 동네로 가서 내가 살던 청기와집을 찾아보고 싶지만 이내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어릴 적 공터에 날리던 흙먼지와 저녁밥 짓는 냄새 그리고 엄마들의 아이 부르는 소리로 이루어진 내 유년시절의 풍경은 이제는 퍼즐 조각 하나를 잃어 영원히 완성되지 못할 그림이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