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봄 새 학기, 게다가 오랜만의 대면 강의라 의욕이 앞섰나 보다.
작년 한 해 비대면 수업을 진행하면서 '아~이건 아닌데' 느꼈던 미안한 마음을 올해는 벌충하리라는...
하지만 입시의 피로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신입생들은 마치 동면 중에 억지로 밖으로 끌려 나온 곰과 같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자기도 모르게 찾아온 햇살에 눈부신 나머지 삶의 초점이 흐릿한 청춘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까
"대학에서의 학문은 사고의 틀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라고 운을 떼며 한 학기 배울 것을 조감도처럼 펼쳐 보인다. 스스로 동기부여하며 체계를 만들어 가길 바란다면 너무 앞선 욕심인 건가
하지만 이런 피상적이고 방사형 수업방식이 어떤 학생들에게는 불편한 모양이다. 잘 차려진 밥상 같은 일타강사의 강의에 익숙한 어제의 수험생에게 오늘 갑자기 직접 차려보라고 빈 상을 쑥~ 들이밀었으니 조금 난감했을 법도 하다.
그중 표정이 어두운 맨 뒷줄의 학생들에게 다가가서 " 오늘 수업 중에 어떤 부분이 잘 이해가 안 되니?" 물으니 한 학생에게서 대뜸 "판서가 안 보여요, 칠판에 불 좀 켜주세요"라고 볼멘소리가 나온다.
'A파트가 좀 어려워요'라는 답변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맥이 풀렸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 대답을 이해할 수가 없다. 안 보이면 쉬는 시간에 나와서 직접 불을 켜면 될 텐데, 3시간짜리 강의 끝날 때까지 뭐하다가 지금 와서 불 좀 켜달라는 게 학생의 자세인가? 답답해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대면 수업이니까 지식 전달보다는 인성교육에 치중한다며 새 학기 2주에 걸쳐 ' 깨어있는 인생~ 어쩌고, 주도적인 삶의 태도~ 저쩌고' 떠들었던 것이 공허한 메아리만 같아서 그저 무색할 따름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수업 중에 해서는 안될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고 말았다
"아이고 이놈아.... 너 나중에 군대 가면 어떻게 할래?"
그러자 그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저 군대 못 가는데요"라고 했다. 순간 나도 아차 싶었다.
씨 뿌린 곡식은 거둘 수 있어도 씨부린 말은 거둬 들일 수는 없는 법.
학생의 미래를 핑계 삼아 당장의 개인의 감정을 배설했으나 뒤처리를 안 한 것처럼 찜찜하기만 하다.
말로는 MZ세대를 알아야 된다고 논하면서 정작 내 수업의 고객인 그들의 언어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반응할 것이 아니라 "칠판이 안 보여요"는 " 수업 노잼이라 눈에 안 들어온다"라는 에두른 컴플레인이었음을 먼저 해석했어야 했다.
어찌 보면 내게 피드백을 해준 그를 무개념, 무기력, 무례하다고 단정 지어 버린 것이다. 불 좀 켜달라는 요구가 그의 인성 그리고 군대생활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학생에게는 관점을 바꾸자 하면서 정작 나는 편견에 빠져 꼰대의 태도를 바꾸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부끄럽다.
칠판 위에 작은 형광등이 숨어 있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교실 천정에 형광등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그가 직접 키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칠판 형광등이라면 그 학생의 말마따나 칠판을 사용 중인 내가 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렇든 저렇든 간에 여기 꼰대 한 명 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