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20년 9월 기준 6년째 솔로였다. 내 인생 최고 우선순위는 일이었고 눈뜨고 잠드는 순간까지, 주말까지 모두 일밖에 없었다. 소개팅이 종종 들어오긴 했지만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거절만 했다. 사실 내심 외롭고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연애를 너무 오랜 기간 안 해서 그런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사건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바쁜 일은 '에이 내가 무슨 연애야'라는 좋은 핑계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업하던 친구가 소개팅을 주선했다. 친구는 더 높은 생산성과 활력을 위해서라도 연애는 필수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내가 또 거절할 것을 예상했는지, 이미 번호도 넘기고 소개받겠다고 답변까지 다 해둔 상태라고 했다. 이 정도로 멍석을 깔아주니 이젠 정말 피하지 말고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내심 고맙다고 느꼈다. 그렇게 그녀에게 첫 카톡을 보냈다.
첫 카톡
그녀는 카톡 한통 한통이 신중한 사람이었다. 뻘쭘함에 내가 이것저것 던진 다양한 화두들을 모두 놓치지 않고 풍부하게 답변해 주었다. 그래서 대화가 즐거웠다. 덩달아 나도 모든 답변을 신중하고 풍부하게 보내기 위해 신경 썼다. 사실 누가 먼저 그랬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질 않는다. 확실한 건 대화 성향이 잘 맞는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둘 다 말을 놓기가 어색해서 존댓말로 대화를 했다.)
카톡을 주고받은 지 며칠, 우린 첫 만남을 약속하였다. 나는 분자요리가 나온다는 이색 레스토랑을 약속장소로 잡았다. 혹시나 대화가 끊기는 어색한 순간이 오더라도, 특이한 음식이 좋은 대화 소재가 되길 바라서였다. 막상 약속을 잡고 나니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살이 쪄서 맞지 않는 옷을 보며, 무엇을 입어야 하나 고민을 이어갔다.
첫 번째 만남 그리고 두 번째 만남
시간은 흘러 약속 당일. 그때를 돌이켜 봤을 때, 강렬하게 기억되는 그녀의 첫인상은 아쉽게도 없다. 모두가 마스크를 끼고 만나는 코로나 시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웃음이 귀여웠다. 단발머리가 깔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체크무늬 치마가 인상적이었다. 이게 첫인상인가?
그녀와의 대화는 상상이상으로 매끄럽고 즐거웠다. 카톡에서 느낀 것처럼 대화 성향이 잘 맞았다. 책이라는 공통 관심사는 우리는 급속도로 가깝게 만들었고, 나중에는 현재 웹소설의 트렌드부터 각자 좋아하는 웹소설 취향까지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주변 친구들하고는 한 번도 나눠본 적 없는 대화소재였기 때문에 더 친밀감을 느낀 것 같다.
2차 자리도 끝이날 무렵. 나는 확신이 생겼다. 오늘 하루 본 게 다고, 물론 아직 알아야 할게 더 많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차차 알아가자.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다는 확신이었다. 사귀자고 말하자!!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매우 신중하고 느린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말 한마디 한마디에 떨림이 담기는 것을 보며 속도를 조금 늦춰야겠다고 느꼈다. 해치지 않는다는 인상을 차근차근 심어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조급함에 휩쓸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놓치기 싫었다.좋아! 3번 정도 만나고 사귀자고 말하면 되겠지?! 애프터 신청으로 일단 내 급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와 그녀는 그때쯤 모두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오히려 주말이 더 바빴다. 그래서 첫 만남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만남도 평일 저녁 7시에 약속을 잡게 되었다. 만남의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두 번째 만남의 저녁메뉴는 근처 맛있는 초밥집으로 그녀가 예약했다.
이번에도 역시 대화는 너무 매끄럽고 즐거웠다. (초밥집의 양은 부족했지만 티 내지 않았다.) 2차로 간 와인바의 하우스 와인도 너무 맛있었다. 와인 하면 분위기, 분위기 하면 와인 아닌가? 와인이 들어가고 약간 취기가 올라오니 또 고백 공격이 마려웠다. 세 번째 만남까지는 참기로 했는데... 하지만 우린 아직 말도 놓지 않았다. 일단 말부터 놓자고 해야겠다.
와인집에서 나와 잠시 함께 걸으며 근처의 공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은근슬쩍 말을 놓자고 말했다. 그녀는 너무 떨려서 말을 못 놓겠다고 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나는 계속 말을 놓으라고 했다. 시작이 반이라고 딱 한마디만 편하게 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심하게 오르내리는 특이한 음정과 바이브레이션을 섞어가며 겨우 말을 놓았다. 이때 느꼈다. 아, 내가 너무 욕심내서 속도를 높이면 안 되겠다. 지금도 좋으니 천천히 알아가자.
세 번째 만남
주말 낮에 세 번째 만남을 가졌다. 이때다 싶어 함께 드라이브를 갔다. 목적지는 평소 즐겨가던 바다가 보이는 카페다. 머릿속엔 애매한 관계의 마침표를 찍고, 제대로 된 만남을 시작할 생각만 가득하다. 하지만 계속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너무 빠른 건 아닌가? 좀 더 늦출까? 프로포즈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일단 지를까? 카페에 앉아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만 재기를 반복했다.
커피도 다 떨어지고, 바깥공기도 쐴 겸 루프탑에 올랐다. 그런데 웬걸? 루프탑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건 딱 지르라고 만든 기회다. 빨리 지르자! 지금이다!!!
마음은 앞섰지만 입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계산은 이미 끝났지만, 6년간 솔로로 지낸 경력은 내 주둥이에 자물쇠를 채워버렸다. 결론은 부끄러워서 고백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결국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카페를 나섰다.
고백은 빨리 하지 않으면 놓친다
그녀는 이제 곧 일을 가야 할 시간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의 템포를 생각하면 사실 세 번째 만남에서의 고백?도 어쩌면 빠르고 부담일지 모른다. 하지만 가정일 뿐이다. 난 오늘 말하겠다 결심했고, 아직 못했다는 게 중요했다. 두근거리고 조금 걱정되지만 빨리 지르자! 오르막길 언덕을 오르며 나는 입을 뗐다.
"저기..."
그런데 그 순간 반박자 빠르게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사실 이 정도 만났으면 뭐든 정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우리가 이다음부터는 더 진지한 관계로 만남을 이어갔으면 좋겠어 오빠는 어때?"
사실 정확한 멘트는 기억이 안 나지만 저 비슷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명확한 사실은 내가 부끄럽게 망설이고 있는 사이 그녀가 먼저 고백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머리가 하얗게 된 것인지 그 이후 내가 뭐라고 했었는지도 지금에 와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소심한 줄만 알았던 그녀는 알고 보니 성질이 급했다. 그녀 스스로 말하길 본인은 빨리빨리 인간이라고 한다.
"아니 말 놓는 것도 그렇게 심하게 떨던 사람이 먼저 그렇게 말을 꺼내냐?!"
떨리는 것과 성질 급한 건 별개라고 한다. ㅎㅎ
아무튼 덕분에 그녀와 나는 지금 4년째 만남을 이어오고 결혼을 준비 중에 있다.
지금 이 자리를 빌어서 말합니다.
고백해 줘서 고맙습니다 마눌님
※ 알고 보니 고백사건이 있었던 우리의 데이트는 세 번째가 아닌 네 번째 데이트였다. 내 기억 속 세 번째 데이트는 어디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