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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까지 태워주는 남자, 끝까지 배웅하는 여자.

by 토마토남

나는 차가 있었고, 그녀는 차가 없었다.


주말에 데이트하는 날이면 나는 매번 아침 일찍 그녀를 데리러 갔다.

그리고 데이트가 끝난 밤에도 역시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내 주변 친구들 대부분이 하는 일이고, 내가 접했던 온라인 세상 속 대부분의 남자들이 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 우려의 목소리도 종종 있었다.


"매일 데려다주다가 하루 못 데려다줬는데 욕먹었다. 그동안 데려다준 고마움은 생각도 안 하는 것 같다."

"매번 데이트 비용을 내가 다 지불했는데, 작은 거 하나 좀 결제하라 했다고 그렇게 화를 내더라."


그리고 이런 사연이나 글의 결론은 늘 같은 곳을 향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여자 잘 보고 만나라. 그리고, 잘해주지 마라"

(하지만 이는 남성들 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여성들의 입장에서도 주로 오르내리는 사례들이 분명 있을 텐데 무엇이 있을까? 이 글을 쓰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아시는 분은 댓글 좀..)


아무튼 그녀와의 만남을 이어가던 중, '이렇게 매번 데려다줘도 괜찮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애초에 맞다 아니다를 판단할 거리가 아니지만, 무의식에 남아있는 위 사례들의 영향 때문이었나 싶다.


'그녀도 변하면 어쩌지?'

'나부터가 먼저 데려다주는 걸 귀찮아하고 꺼리게 되진 않을까?

'결국 그렇게 될 것이라면, 미리 적당히 균형을 잡아야 할까?'


짧은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쳤지만 나는 이리저리 재는 연애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상대라면 재는 연애는 안 해도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기도 했다. 진심을 받고 싶다면, 먼저 진심으로 대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미 그녀가 나에게 진심을 주고 있으니, 나 역시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고도 생각한 것이다.


물론 상대방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과 데려다주고 말고는 다른 문제긴 하다. 이래저래 여러 이유를 대긴 했지만 아무튼 난 내가 움직이는 게 마음이 편했고, 더 이상 이와 관련해서 고민하기 싫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나 자신을 다잡기 위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 어차피 약속장소를 잡고 만나는 것보다 데리러 가는 게 효율적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 집까지 데려다주는 것도 데이트의 연장이다. 재미있게 생각하자. (늘 재미있었고, 그리 힘들지도 않았다.)

- 그녀를 데리러 가고 데려다주는 건 호의가 아니다. 내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하자. 이건 나를 만나는 동안 그녀가 누릴 권리다. (반대로 나 역시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러한 원칙을 바탕으로 나는 그녀와 만나며 지금까지 늘 데리러 가고 데려다 주기 위해 노력했다. 못 지킨 날도 있다. 피곤해서 귀찮았던 적도 있다. 지각한 날도 많다. 하지만 3년 넘게 만나면서 처음의 결심을 지키기 못한 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과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다.)




데리러 갔을 때도, 데려다 줄 때도, 그녀는 늘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고마움을 표현해 준다. 나는 당연한 거라고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심지어 내가 지각한 날에도 웃으며 괜찮다고 한다. "날 위해 여기까지 데리러 와주는데!, 그만큼 나보다 더 일찍 움직이는데!, 조금 늦는다고 내가 뭐라 하면 안 되지!"


이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프로포즈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난 여느 날과 같이 데이트를 위해 그녀를 데리러 갔다. 그런데 평소답지 않게 그녀가 10분? 15분? 정도 지각을 했다. 늦잠을 잤다고 한다.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게 정말 속상했었던지 나에게 계속 사과를 했다. 데리러 오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사건은 그다음 주에 일어났다. 역시 데이트하는 날이었고, 나는 출발을 앞두고 집에서 한창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 오고 있어?"

"?! 나 아직 준비 중인데?! 아직 시간 여유가 있는데 내가 약속시간을 착각했나?"

"응? 앗? 헉! 아니야 내가 착각했네!"


알고 보니 그녀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순간 자신이 또 늦잠을 잔 줄 착각하고 깜짝 놀라서 부랴부랴 준비해서 나온 것이었다. 무려 1시간이나 일찍... 지난주의 지각 경험이 그 정도로 큰 충격과 반성을 줬던 것일까...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웃기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나 스스로가 데려다주는 것에 대해 나름의 기준을 세운 것처럼, 그동안 그녀 역시 그녀만의 기준과 원칙을 세웠던 것일까. 이렇게 글로 쓰다 보니 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아직도 매번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그녀는 매번 내 차가 사라질 때까지 내 차를 향해 손을 흔든다.


이제 곧 우리는 결혼하고 함께 살게 된다.

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도 못 보게 될 텐데 그게 약간 아쉽다.


이 글을 통해 그 순간을 앞으로도 계속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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