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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Sep 16. 2020

전화 안 받을 거야? 너 왜 그래.

무너지지 않기 위해.

병실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입원 수속을 하고 병실에 올라와 꽤 많은 일이 있었다.

남편은 회사에 있고, 혼자 병실에 앉아 숨을 좀 돌리는 중에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언니에게서 카톡이 왔다...




언니와 나는 쿵짝이 잘 맞거나 애틋한 자매가 아니었다.

오히려 무뚝뚝함으로 무장한 형제 같은 자매였다. "이거 옷 잘 산 것 같지 않아?"라고 물어보면 "그러네."라고 대답하는, "어디 가게?"라고 물어보면 "갔다 올게."라고 말하는, 우린 그런 자매였다.

서로의 마음을 궁금해하지도, 애써 속에 있는 말을 하지도 않는... 그런 자매.


이런 내가, 어릴 때는 언니 뒤를 졸졸 쫓아다녔었다. 직업군인이었던 아빠와 사치가 심한 엄마 덕에 언니는 좋은 교육을 많이 받았고 똑똑하고 예뻤다. 친구들도 많았다. 피아노 신동으로 불리며 예쁜 드레스를 입고 독주회를 열던 4살 위 언니는 내게 우상과도 같았다. 그런 언니가 10살이 되던 해 엄마는 집을 나갔고 어리디 어린 언니는 언니가 아닌 엄마가 되었다. 언니는 매일 밤 우는 나를 업어 재웠고 피아노를 치는 대신 라면을 끓였다. 그때부터 그녀는 언니도 아닌 엄마도 아닌 엄마 같은 언니가 되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힘들었다. 아빠의 모든 재산은 엄마와 함께 사라졌고 우리는 어두운 지하방에 살며 꿈과 빛을 잃었다. 돈 버는데 능력이 없었던 아빠 대신 난 대학 원서비를 벌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고 언니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치열하게 일했다. 우리는 세월을 되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아니... 되돌아볼 이유가 없었다.

지난날들이 너무 힘들었기에 기억하고 싶은 날도 추억하고 싶은 시간도 없었다. 지난날들은 그저 상처였다.


때문에 우리는 지난날의 상처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정성스럽게 입을 닫고 살았다. 기억하지 않았다. 공유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음도 닫았다. 마치 마음을 열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라도 할 것처럼 굳게 닫아버렸다.


언니는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결혼하여 영국으로 떠났고 어느새 미국에 정착했다. 언니와 함께한 시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았음을 나는 가끔 깨닫는다. 지난날을 치유할 시간이 우리에겐 부족했음을.


그런 이유로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내가 암환자가 된 것을 알았을 때 언니는 빨리 병원을 알아보라며 안달이었다. 내게 전화했지만 나는 받지 않았고 갈수록 카톡이 쌓여갔다.

"병원 알아봤어?" "몇 기라고 얘기 들었어?" "다른 곳에 전이 있대?" "항암 해야 한대?" "그 교수는 유명해?" "뭐 하는 거야 전화 안 받고!"


...

...

나도 몰라... 나도 모른다고. 1기인지 3기인지 나도 몰라... 지금은 나도 모른다고! 병원에서도 항암 할지 안 할지 모른대! 수술해봐야 안다고!!

이렇게 수십 번을 말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도 모른다고를 외쳤다. 통화는 하기 싫어서 카톡에 대답을 보냈는데 모른다고 말하면 또다시 카톡이 왔다.

왜 모르냐고. 그럼 도대체 뭘 검사한 거냐고... 확실한 거냐고... 그래서 항암은 하는 거냐고...

답답했다. 한국에 들어올 생각도 안 하면서 질문만 해대는 언니한테 화가 났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언니. 나도 몰라. 진짜 모른다고. 수술 끝나면 뭐 얘기가 있겠지. 나 힘드니까 연락 좀 그만해."


이후 언니는 노발대발이었다... 우리 남편에게 전화해서 걘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거냐며 화를 냈다.

가족 걱정시키려고 작정한 거냐면서, 이렇게 암이라고 던져놓고 아무 말도 안 하면 아빠랑 자기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근데 말이야. 언니.

나는... 언니랑 아빠 목소리를 들으면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아. 난 지금 하루하루 너무 힘들게 버티고 있어.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나에게 수백 번도 더 말해.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아이 앞에서 울음을 참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어. 그런데 아빠랑 통화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언니랑 통화하면 뭐할 건데... 옆에 있을 것도 아니잖아.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울기밖에 더 하겠어? 난 울음을 참아낼 자신이 없어. 언니와 아빠 목소리를 들으면 어린애처럼 울게 될 테니까... 그러면 참고 있던 내 눈물의 봉인이 풀어질 것 같거든. 무너질 것 같아... 내가. 무너질 것 같다고... 그래서, 울지 않을 수 있을 때. 그때. 그때 통화하자... 그러니 좀 기다려.

그리고 정말 난 지금 아무것도 몰라. 아빠나 언니한테 알려줄 것이 없어. 정리되면 말해줄게.



이렇게 보낼 수 있었다면... 언니가 조금 덜 화냈을까.

하지만 이런 말을 내뱉는 것조차 어색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나였기에 언니는 화를 참 많이 냈다.


그리고 수시로 남편한테 내 상태를 묻던 언니에게서 카톡이 왔다.

"병원 입원했다는 소리 들었어. 수술 잘 받고... 아빠한테는 내가 말했다. 아빠가 니 눈치 보느라 너한테 전화도 못하는 것 같던데 아빠한테 전화 좀 해. 노인네 혼자 집에 있으면서 속 터져하니까 빨리 마음 정리하고 연락 좀 해. 그리고 가족들 걱정 좀 그만시켜라."


...

언니의 그 연락을 받고 나는 병실 침대에 앉아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빠한테 한번 연락해볼까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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