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1인실을 배정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1인실보다 2배 비싼 패밀리룸을.
설마 했지만 역시나 예상보다 더 높은 방을 주는구나. 이 돈이면 우리 가족 5성급 호텔에서 먹고 자고 놀 수 있는데... 남편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병동에 올라가서 본 패밀리병실이란...
이런 거구나. 엄청나게 푹신한 침대, 작은 주방, 화장실, 거기에 거실까지 딸려 있었다. 보호자가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 그래서 패밀리룸이구나. 가족들 잘 지내라고.
병실 이곳저곳 사진을 찍어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보냈다. "미안하다. 패밀리룸이다..."라는 말과 함께.
넓디넓은 병실에 홀로 남았다. 혈관은 저녁에 잡는다고 했으니까 지금 내가 할 일은 한 가지. 유서를 쓰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유서를 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 바빴다. 식탁에 앉아 유서를 쓸만하면 아이가 달려와 놀아달라 했고 밤에는 마주 앉은 남편이 계속 말을 걸었다. 아이와 남편이 각자의 일터로 가고 나면 난 청소하느라 바빴다. 청소하고 반찬을 만들고... 한숨 돌린 후 펜과 종이를 펼칠만하면 또다시 아이가 달려왔다. '이따 쓰지머, 내일 쓰지머...' 이러며 하루하루를 넘겼고 결국 수술 전날이 되었다.
왠지 유서는 꼭 써야 할 것 같았다. 위험한 수술은 아니었지만, 의료진은 훌륭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게 있으니까... 생각지도 못하게 세상을 떠날 것을 대비해 유서를 써놔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끝내 집에서는 쓰지 못했고 결국 펜과 종이를 병원까지 들고 왔다.
이제 지금, '조용한 이 시간에 맘껏 쓰자' 라고 생각했을 때 아는 암환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병원 왔어? 몇 호실이야? 운동할 겸 내가 갈게."
아~ 맞다. 지인이 입원 중이었지. 연락한다는 것을 깜빡했다.
그 지인은 병실로 찾아왔고 우리는 한참 수다를 떨었다. 그녀는 수술을 받은 직후였기에 경험담을 잔뜩 들려주었고 그 생생함을 듣느라 나는 유서 쓰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녀가 자신의 병실로 돌아간 뒤 고요함이 찾아왔음에도 군데군데 시퍼런 멍자국이 남아있는 그녀의 팔을 떠올리느라 유서 쓰는 일은 잠시 미뤄두었다.
밥 한 끼 먹었을만한 시간이 지나고 나는 다시 펜과 종이를 펼쳤다. 손가락 사이에서 펜을 굴리며 첫 문장을 고민하고 있을 때 드르륵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들어왔다. 간호사는 마침 1인실 자리가 났다며 옮길 거냐 물었고 당장 옮기겠다 말한 나는 캐리어를 끌고 1인실로 향했다. 병실을 옮긴 후에야 캐리어를 풀고 짐을 정리했다. 짐을 여기저기 넣어두고 정리하고 나니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혈관에 주사를 꽂으러 올 때가 됐는데... 간호사가 오기 전에 빨리 유서를 써야 한다.
침대에 앉아 테이블을 올린 뒤 종이와 펜을 노려보았다. 기필코 쓰리라.
하지만 나는 유서 쓸 운명이 아니었나 보다. 갑자기 활기찬 목소리의 의료진이 들어와 내 다리의 치수를 재갔고 그 뒤에 간호사가 들어와 혈관에 링거를 놓았다. 그 뒤에는 수간호사가 들어와 수술 후 주의사항을 설명해주었고 곧바로 전공의가 들어와 수술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솜 좀 돌릴만할 때... 언니에게서 카톡이 왔다. 걱정 좀 그만시키라고, 아빠한테 연락 좀 하라는 카톡.
힘이 쫙 빠졌다. 주사를 꽂느라, 설명을 듣느라, 언니 잔소리 듣느라... 힘이 쫙 빠져버렸다.
나는 한쪽에 치워놨던 하얀 종이와 펜을 가방에 구겨 넣으며 격하게 궁시렁거렸다.
"에~이씨! 유서 한번 쓰기 드릅게 힘드네... 안 쓰고 만다 내가! 아이고 힘들어..."
병원생활이 원래 이리 바쁜 것을... 잊고 있었다, 내가.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고 남편이 왔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빠에게 한차례 전화를 걸었고 유서 대신 소원을 빌었다. 두 손을 모아 그리고 온 마음을 모아 간절하게.
"하나님. 그리고 부처님. 제 소원 좀 들어주세요. 그동안 저한테 잘해주신 거 없잖아요. 이번에 한꺼번에 갚아준다 생각하시고 저 좀 살려주세요. 수술 잘 끝나고 아이와 뛰어놀 수 있도록 은혜를 주세요. 아이와 30년은 더 살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앞으로 더 착하게 살게요. 한 번만 좀 들어주세요."
모태신앙이었던, 하지만 결혼 후 부처님을 존중하게 된 나의 소원을... 두 분이 들어주시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잠을 청했다. 내일 수술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