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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Sep 24. 2020

수술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면...

아직도 모르겠다. 뭐가 좋은 건지.

수술 전 전공의가 내게 물었다.


 "개복하고 싶으세요 복강경 하고 싶으세요? 난소는 떼고 싶으신가요, 놔두고 싶으신가요?"


이 어려운 질문에 난 그냥 "교수님께서 하라시는대로 할게요. 뭐가 좋을지 모르겠어요."라고 했다.


개복을 하면 시야가 넓어져 정확한 수술이 가능하지만 회복과 후유증이 꽤 있을 것이고 복강경으로 하면 회복과 후유증은 가볍겠지만 개복에 비해 정확하지는 않다고 했다.

그리고 난소는... 난소를 떼면 난소암이나 전이의 확률을 줄일 수 있지만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아 갱년기가 올 것이라 했다. 내 나이 37세. 갱년기를 겪기엔 아직 이른 나이기에 전공의는 고심하는 눈치였다.


뭐가 좋을지 정말 알 수 없었다. 개복을 하고 난소를 제거하면 살 확률이 올라가는 것일까.

복강경을 하고 난소를 살리면 살 확률이 떨어지는 것일까.

전공의에게 물어보니 그런 건 아니라고 했다. 생존율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1기 환자든 4기 환자든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다고...

그러니 더 결정할 수 없었다. 그저 교수님 뜻에 따르겠다고 할 수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다.


내 뜻을 전하니 전공의는 "그럼 난소는 수술 중에 확인하면서 결정할게요. 그리고 수술 방법은 교수님께서 일하나님 내진해보시고 결정하실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수술 당일.

나의 수술은 복강경으로 결정되었다.




수술이 끝난 후 병실에 돌아와 정신을 차려보니 내 몸에는 주렁주렁 많은 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양쪽 손등에 링거줄이 꽂혀있었고 방광에는 소변줄이 꽂혀있었다. 배에는 폭탄이라고 불리는 피주머니가 달려있었고 다리 전체에는 공기압 마사지기가 감겨있었다.

아빠는 내 몸에 달려있는 그것들을 보면서 "뭘 이렇게 많이 달아놨어. 이게 다 뭐야..." 라며 투덜거렸다.

팔에는 여기저기 시퍼런 멍도 있었는데 아마도 수술용 바늘을 꽂기 위해 어지간히 노력을 한 듯 싶었다. 내가 마취되어 있는 동안 숨은 혈관을 찾아다녔을 의료진들을 생각하니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찔러댄 걸까. 그나마 마취하고 찔렀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다.


아빠를 집에 보낸 후 핸드폰을 보고 있던 남편에게 말했다.

"내 몸에 줄이 참 많네. 이거 어떻게 다 끌고 다니지?"라고 했더니 남편이 어이없다고 웃었다.

침대에서 발이나 움직여보고 그런 소리를 하라며...


그렇네... 수술 후 반나절 동안 나는 발 한번 까딱하지 못했다. 허벅지는 아예 감각이 없었고 팔은 주사 때문에 여기저기 불편했다. 배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에 다리 한번 올릴 수도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최대한 깊이 숨을 쉬는 일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힘들게.


간호사가 중간중간 들어와 내 자세를 확인하며 남편에게 말했다.

"환자분 자세 바꿔주고 계시죠? 수술할 때 한 자세로 오래 있었기 때문에 피부 면역이 약해져서 2시간만 지나도 욕창 생기거든요. 같은 자세로 계시면 안 되고 한두 시간마다 꼭 바꿔주세요. 그렇다고 너무 많이 움직이면 환자분 힘드시니까 살~짝 옆으로 돌린 다음에 등에다가 베개 받쳐주시면 돼요. 그렇게 계속 바꿔주세요~"


옆으로 돌아눕는 일... 나는 그 쉬운 일조차 혼자 할 수 없었다. 남편은 내 등 밑에 자기 팔을 밀어 넣은 다음 천천히 나를 돌리고 한쪽 팔로 잽싸게 베개를 받쳤다. 그렇게 자세를 바꾸고 나면 난 또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행위를 반복하며 밤이 되었을 때 나는 갑자기 어깨와 옆구리 쪽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칼로 여기저기를 찌르는 것 같았다. 내 옆구리를 내 어깨를. 너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겪어보지 못한 통증이었다. 수술 직후 통증과는 다른, 칼로 찌르면서 동시에 살들을 움켜쥐는 느낌? 내 몸에 달려있는 무통주사도, 진통제도 소용없었다.

"아~ 어떡해.. 아윽... 아파... 아! 뭐야, 이거... 오빠... 아 나 너무 아파! 아 어떡해!!! 아.. 너무 아파!"

순간 얼굴이 빨개지며 소리를 질러대는 나를 보고 남편은 병실 밖으로 튕겨나갔다.

잠시 후 뛰어들어오는 남편과 간호사가 보였다. 간호사는 어디가 아프냐고 내 몸 여기저기를 살폈고 난 어깨랑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아니, 모르겠다고. 그냥 숨을 못 쉬겠다고 너무 아프다고 울었다.

곧이어 빠른 걸음의 의사가 나를 찾아왔다.

내 몸의 이곳저곳을 보던 의사는 숨은 잘 쉬고 있었냐고 물었고 폐가 아직 안 펴져서 그럴 수도 있으니 엑스레이를 찍어보자 했다. 그리고 가스통일 수도 있다고 했는데... 

결론은 가스통이었다. 가스통? 가스 통증?


나는 수술시 배에 4개의 구멍을 뚫었다. 그 구멍으로 배 안의 장기들을 보기 위해서는 몸 안에 가스를 주입해야 한다고 했다. 배가 부풀어오를 수 있게.

수술이 끝날 때 최대한 가스를 빼주지만 어느 정도의 가스는 몸안에 남는다고 했다. 그리고 남아있던 가스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통증을 유발하는데 그게 가스통이다. 가스통을 느끼는 사람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데 나는 유별나게 겪었다.

멀쩡하다가도 갑자기 날카로운 아픔을 느꼈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지곤 했다. 그러다가도 몇 시간 동안 근육통처럼 묵직하게 아프기도 했다. 내 몸 안의 가스는 여기저기를 부지런히도 옮겨 다녔다. 오전에는 왼쪽 어깨, 오후에는 오른쪽 어깨, 밤에는 옆구리.

가끔씩 가스 덩어리가 울룩불룩 이동하는 게 느껴질 때면 '얘는 이번엔 어디에 정착하려나...'라는 생각을 했다.


가스통을 없애는 방법은 몸안의 가스를 빼는 것뿐이었다. 운동을 해서 방귀로 열심히 내보내는 것만이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맹장수술처럼 비교적 가볍게 끝날 가스가 아니었다.

수술이 끝나자마자 방귀를 뽕뽕 뀌며 병실에 올라왔음에도, 병실에 올라와서 시원하게 가스를 수차례 내보냈음에도 아픔은 계속되었다... 간호사는 말했다. 내 배에 들어간 가스의 양은 어마어마하다고. 그러니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고.


그날 밤.

몸은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가스통은 수시로 오고, 아파서 뒤척이면 몸속 장기들이 엉키는 듯 또 아프고, 정말이지... 수술하고 못 움직이는 그 하루 동안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때문에 나는 괜히 복강경으로 했다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러나 다음 날 깨달았다. 복강경과 개복의 회복 속도는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을.


나는 아침이면 보호자를 잡고 설 수 있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면 보호자를 붙잡고 한 발자국씩 걸을 수 있었다.

3분을 걷는데도 땀이 줄줄 흐르고 눈 앞이 핑 돌았지만 어쨌든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와 같은 날 개복 수술을 한 환자는 그러지 못했다.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들은 늘 말했다.

"복강경이 좋은 거야. 회복이 빠르잖아. 개복은~ 아이고... 말도 못 해. 너무 아파."


그럴 때마다 나는 하찮은, 그리고 진심인 말을 위로라고 건넸다. 

"그래도 개복은 구석까지 다 볼 수 있다고 하니까 깨끗하게 다 제거되셨을 거예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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