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내가 퇴원하는 날까지 나의 간병인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와 함께 지냈다.
우리는 수술 직후부터 2인실에 있었는데 덕분인지 때문인지 몇몇의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다. 또 좋은 분들이었다. 조용히 다가와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못 먹어서 어쩌냐 걱정도 해주었다. 내가 아이 동영상을 보고 있을 때면 아이가 귀엽다며 엄마로서 잘 견디라고 격려도 해주었다.
아빠는 그런 환자나 보호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최대한 목소리를 작게, 걸음도 조심스럽게. 평소 목소리가 워낙 큰 아빠였기에 걱정을 했었지만 아빠는 생각보다 조심스럽고 무난하게 잘 해내고 있었다. 덕분에 같은 병실의 보호자들과는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세번째 환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오십 대 초반의 세 번째 환자가 들어온 후부터 병실의 공기는 달라졌다.
그 환자는 통증이 심한 말기 암환자였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달되어 아빠는 점점 예민해졌다. 그리고 일은 벌어졌다.
어느 날 그 환자의 남편이 우리 쪽으로 와서 아빠에게 음료수를 하나 건넸다.
"어르신 많이 힘드시죠? 그래도 따님이 젊으니까 잘 버틸 거예요. 수술 바로 한 거 보면 기수도 낮을 것 같고... 암환자가 수술할 수 있는 건 운이 좋은 거예요. 하고 싶어도 못하는 환자들 많아요~"
아빠는 음료수를 받아들며 "예.. 예.. 감사합니다. 그래도 안 아픈 게 제일 좋죠. 딸내미 병간호하고 있으니 별 생각이 다 듭니다."라고 했다.
그때부터 아저씨는 하소연인지 격려인지 조언인지 모를 소리를 아빠에게 하기 시작했다.
"암이란 게 정말 무서운 병이에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제 아내도요, 1년 전에는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어요. 수술 끝내고 맛있는거 먹고 여행도 다니고 진짜 건강하게 살았는데 몇 달 만에 이렇게 됐어요. 지금은 할 수 있는 치료도 없대요. 이번에도 통증만 좀 잡으려고 들어왔는데 진통제도 안 듣고.. 사람 피말리는거예요. 암이란 게... 그러니 관리 진짜 잘하셔야 해요."
...
그 말을 들은 나는 '아저씨가 많이 힘드신가보다...'하고 가만히 있었지만... 아빠는 아니었다.
발끈한 아빠가 그 아저씨에게 말했다.
"우리 애는 초기예요~ 초기."
그리고 아빠 말에 더 발끈한 아저씨가 또 말했다.
"아이고~ 어르신. 우리도 초기였어요. 저희는 항암도 안 했어요. 수술만 하고 끝났어요. 병원에서 항암이나 방사선 할 필요도 없다고 해서 이젠 끝이구나 했어요. 근데 1년 만에 이렇게 됐다니까요?! 암은 초기고 뭐고 다 필요 없어요."
...
그 순간 병실엔 정적이 흘렀다.
나는 못 들은 척 바닥을 내려다봤고 아빠는 충격을 받았는지 "아효..."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괜한 손등만 계속 쓸어내렸다.
그리고 아저씨는... 그 순간이 무안했는지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그분은 아마도 자기의 고충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밤새 섬망 증상을 겪는 아내를 둔 자기의 심정을... 그리고 이제 막 암환자가 된 내가 안타까웠는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자기 아내처럼 될까 봐 걱정스러웠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것저것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처지에 비해 나아 보이는 나를 보니 부럽거나 마음이 상했을 수도 있다.
'너도 언제 내 아내처럼 될지 몰라. 그러니 안심하지 마.'라는 심정으로.
하지만 이유가 어쨌든 아빠에게 그런 말을 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 당시 아빠와 나는 정확한 병기를 몰랐다. 병원에서 말하는 예상 병기는 1기 아니면 3기였다.
수술이 잘 끝났고 수술 중 응급검사에서 전이된 곳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우리는 그저 마음대로 1기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믿고 있었다. 분명 1기일 거라고.
그런 우리에게 '초기여도 1년 후 말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너무도 무서운 말이었다.
모든 희망을 짓밟는 말...
그 날 이후 아빠의 한숨은 늘어만 갔다.
다음날, 그 아저씨는 쟁반에 과일을 한 아름 담아 내게 주었다.
먹어야 낫는다고. 그러니 조금이라도 먹으라고. 그리고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종이에 적혀있는 것은 자궁암에 관한 여러 자료가 있는 사이트였다. 본인의 아내가 재발했을 때 연구를 많이 하며 찾은 곳이라고. 다른 사이트는 헛소리가 많아서 도움이 안 되니 전문적인 곳에 가서 보라고. 병을 정확히 알아야 이길 수 있다고. 공부해서 꼭 이겨내라고.
그 후 뒤돌아서 가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려왔다. 아직 젊은데... 아내를 잃어가는 느낌은 어떤 걸까. 아이들의 엄마를 잃어가는 느낌은 어떤 걸까... 우리 남편의 모습이 겹쳐져 마음이 아리고 또 아려왔다.
...
그날 오후 그분들은 병실을 옮겼다.
그분들이 나가고나니 아빠는 이제 좀 살겠다며 내게 말했다.
"에휴.. 저분들 가니까 좀 살겠다. 살면서 저렇게 아파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아빠도 중환자실에 있어봤지만 저 사람은 더 한 것 같아. 아휴... 참 나원. 아니 근데 저렇게 아파하는데 왜 약을 안 주는 거야. 안 아프게 약을 많이 줘야지! 보는 것도 힘든데 아픈 사람은 얼마나 아프겠어~."
그런 여린 아빠에게 '그나마 제일 센 약을 투여해서 그 정도였다고.. 간호사가 말했는데 저 고통은 뼈와 살을 발라내는 고통이라 병원에 있는 약으로는 잡을 수 없다고. 암성 통증이란 그런 거라고.'라고 하지 못했다.
대신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아지시겠지.. 신경차단술 받는다고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