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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Oct 11. 2020

병실 보호자들의 신경전

우리 애는 초기예요.

아빠는 내가 퇴원하는 날까지 나의 간병인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와 함께 지냈다. 


우리는 수술 직후부터 2인실에 있었는데 덕분인지 때문인지 몇몇의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다. 또 좋은 분들이었다. 조용히 다가와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못 먹어서 어쩌냐 걱정도 해주었다. 내가 아이 동영상을 보고 있을 때면 아이가 귀엽다며 엄마로서 잘 견디라고 격려도 해주었다.


아빠는 그런 환자나 보호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최대한 목소리를 작게, 걸음도 조심스럽게. 평소 목소리가 워낙 큰 아빠였기에 걱정을 했었지만 아빠는 생각보다 조심스럽고 무난하게 잘 해내고 있었다. 덕분에 같은 병실의 보호자들과는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세번째 환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오십 대 초반의 세 번째 환자가 들어온 후부터 병실의 공기는 달라졌다.

그 환자는 통증이 심한 말기 암환자였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달되어 아빠는 점점 예민해졌다. 그리고 일은 벌어졌다.



어느 날 그 환자의 남편이 우리 쪽으로 와서 아빠에게 음료수를 하나 건넸다.

"어르신 많이 힘드시죠? 그래도 따님이 젊으니까 잘 버틸 거예요. 수술 바로 한 거 보면 기수도 낮을 것 같고... 암환자가 수술할 수 있는 건 운이 좋은 거예요. 하고 싶어도 못하는 환자들 많아요~"


아빠는 음료수를 받아들며 "예.. 예.. 감사합니다. 그래도 안 아픈 게 제일 좋죠. 딸내미 병간호하고 있으니 별 생각이 다 듭니다."라고 했다.


그때부터 아저씨는 하소연인지 격려인지 조언인지 모를 소리를 아빠에게 하기 시작했다.

"암이란 게 정말 무서운 병이에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제 아내도요, 1년 전에는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어요. 수술 끝내고 맛있는거 먹고 여행도 다니고 진짜 건강하게 살았는데 몇 달 만에 이렇게 됐어요. 지금은 할 수 있는 치료도 없대요. 이번에도 통증만 좀 잡으려고 들어왔는데 진통제도 안 듣고.. 사람 피말리는거예요. 암이란 게... 그러니 관리 진짜 잘하셔야 해요."


...

그 말을 들은 나는 '아저씨가 많이 힘드신가보다...'하고 가만히 있었지만... 아빠는 아니었다. 

발끈한 아빠가 그 아저씨에게 말했다.

"우리 애는 초기예요~ 초기."


그리고 아빠 말에 더 발끈한 아저씨가 또 말했다.

"아이고~ 어르신. 우리도 초기였어요. 저희는 항암도 안 했어요. 수술만 하고 끝났어요. 병원에서 항암이나 방사선 할 필요도 없다고 해서 이젠 끝이구나 했어요. 근데 1년 만에 이렇게 됐다니까요?! 암은 초기고 뭐고 다 필요 없어요."


...

그 순간 병실엔 정적이 흘렀다.


나는 못 들은 척 바닥을 내려다봤고 아빠는 충격을 받았는지 "아효..."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괜한 손등만 계속 쓸어내렸다.


그리고 아저씨는... 순간이 무안했는지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그분은 아마도 자기의 고충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밤새 섬망 증상을 겪는 아내를 둔 자기의 심정을... 그리고 이제 막 암환자가 된 내가 안타까웠는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자기 아내처럼 될까 봐 걱정스러웠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것저것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처지에 비해 나아 보이는 나를 보니 부럽거나 마음이 상했을 수도 있다.

'너도 언제 내 아내처럼 될지 몰라. 그러니 안심하지 마.'라는 심정으로.


하지만 이유가 어쨌든 아빠에게 그런 말을 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 당시 아빠와 나는 정확한 병기를 몰랐다. 병원에서 말하는 예상 병기는 1기 아니면 3기였다. 

수술이 잘 끝났고 수술 중 응급검사에서 전이된 곳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우리는 그저 마음대로 1기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믿고 있었다. 분명 1기일 거라고.

그런 우리에게 '초기여도 1년 후 말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너무도 무서운 말이었다.

모든 희망을 짓밟는 말...


그 날 이후 아빠의 한숨은 늘어만 갔다.




다음날, 그 아저씨는 쟁반에 과일을 한 아름 담아 내게 주었다.


먹어야 낫는다고. 그러니 조금이라도 먹으라고. 그리고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종이에 적혀있는 것은 자궁암에 관한 여러 자료가 있는 사이트였다. 본인의 아내가 재발했을 때 연구를 많이 하며 찾은 곳이라고. 다른 사이트는 헛소리가 많아서 도움이 안 되니 전문적인 곳에 가서 보라고. 병을 정확히 알아야 이길 수 있다고. 공부해서 꼭 이겨내라고.


그 후 뒤돌아서 가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려왔다. 아직 젊은데... 아내를 잃어가는 느낌은 어떤 걸까. 아이들의 엄마를 잃어가는 느낌은 어떤 걸까... 우리 남편의 모습이 겹쳐져 마음이 아리고 또 아려왔다. 


...

그날 오후 그분들은 병실을 옮겼다.

그분들이 나가고나니 아빠는 이제 좀 살겠다며 내게 말했다.

"에휴.. 저분들 가니까 좀 살겠다. 살면서 저렇게 아파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아빠도 중환자실에 있어봤지만 저 사람은 더 한 것 같아. 아휴... 참 나원. 아니 근데 저렇게 아파하는데 왜 약을 안 주는 거야. 안 아프게 약을 많이 줘야지! 보는 것도 힘든데 아픈 사람은 얼마나 아프겠어~."


그런 여린 아빠에게 '그나마 제일 센 약을 투여해서 그 정도였다고.. 간호사가 말했는데 저 고통은 뼈와 살을 발라내는 고통이라 병원에 있는 약으로는 잡을 수 없다고. 암성 통증이란 그런 거라고.'라고 하지 못했다.


대신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아지시겠지.. 신경차단술 받는다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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