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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Oct 09. 2020

씩씩한 환자, 불안한 환자, 아픈 환자

모두 아프지 마시길...

수술 직후 2인실로 옮겼던 나는 여러 명의 암환자들을 만났다.


처음 만난 환자는 나와 비슷한 또래였는데 성격이 정말 밝았다. 그녀는 결혼은 했고 아이는 없다고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울컥하며 대화를 하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항상 웃으면서 얘기했다.

"어차피 애 가질 생각도 없었는데 괜찮아. 이제 자궁 뗐으니 아예 글렀지뭐! 애 없는 게 다행일 수도 있고. 너는 집에 가면 애 봐야 한다며... 되게 힘들 텐데... 나는 그냥 쉬면 되니까. 어쩌면 이게 나은 것 같아."


또한 항암을 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던 내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항암 하면 되지~ 어쩌겠어! 부작용 약 맞으면서 하면 돼~ 요즘 약 좋."


실제로 그녀는 의료진에게서 '항암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웃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어쩔 수 없죠뭐. 항암 하면 암세포 다 없어지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망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늘 슬픔에 잠겨있던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고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빠는 그녀를 참 많이 좋아했다. 저런 환자랑 자주 어울리라며...


그녀는 호중구 수치가 낮아서 항암이 밀렸을 때조차 씩씩했다. 그녀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항암 밀렸어. 나 되게 잘 먹는데 이상하네. 호중구 올리려면 오늘 더 많이 먹어야겠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잘 살고 있다. 그녀는 내가 만난 암환자들 중 제일 긍정적인 사람이다.



두 번째 만난 환자는 50대 아주머니였다. 하루정도 같이 있었는데 그분은 나만큼 불안이 커 보였다.

늦은 오후, 아이의 동영상을 보며 울고 있으니 아주머니가 병상 사이 커튼을 젖히며 왜 우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이제 5살인데.. 제가 혹시 잘못될까 봐 겁나요.. 아이가 스무살만 됐어도 이렇게 무섭지는 않았을텐데..."라고 대답했다. 내 말에 아주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울먹이며 말했다.


"내 아이가 지금 딱 스무살이야.. 근데... 아니야. 안 그래. 지금 애가 스무살인데도 너무 무서워. 다섯살이든 스무살이든 애 놔두고 죽을 거란 생각을 하면 똑같은 거야. 애가 아무리 컸어도... 무서워. 스무살도 나한테는 애기야."


그 말은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고 동시에 아주머니와 나를 더 훌쩍이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아주머니의 남편은 우리 둘 앞에 서서 말했다.


"아이고... 두 분이 똑같네. 내보기엔 둘 다 초기인 것 같은데 왜들 그래요~~ 겁이 너무 많아. 일어나지도 않을 일 가지고 울지 말고 밥 좀 드셔. 밥 좀. 우리 와이프도 밥을 통 안 먹어서 답답한데 여기 젊은 애엄마도 안 먹는 것 같더만. 두 사람은 안 죽는다니까!?"




그리고 세 번째.


세 번째 만난 환자는 내가 병원생활을 하는 동안 나를 참 힘들게, 그리고 가슴 아프게 한 환자였다.


그녀는 1기 암에서 1년 만에 온 몸으로 전이된 말기 암환자였다. 통증이 너무 심해 신경차단술 등의 치료를 받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녀의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루에 수십 번 통증이 반복됐는데 어떠한 진통제로도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고통에 몸부림칠 때마다 가족들은 옆에서 함께 흐느꼈고 병실을 같이 쓰던 나와 남편, 아빠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녀는 종종 섬망증상을 겪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얘기하듯 혼자 중얼거리고, 몸에 이어폰이 연결되어 있다며 링거줄을 잡아 뽑았다.


그녀가 신음할 때면 나도 같이 고통스러웠다. 그녀와 같은 신체적 고통을 겪는 것 같았다고 감히 말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무서웠다. 나도 나중에 비슷한 고통을 겪게 될까 봐... 무섭고, 또 무서웠다.

어쩌면 남편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어느 날 남편은 내게 병실을 옮기자고 했다.

"자기야.. 우리 병실 옮길까? 다른 2인실로 가든... 아니면 6인실로 가든. 여기 자리 좋긴 한데... 하~ 나도 좀 힘들긴 하네. 옆에 아주머니가 너무 아파하시니까...."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방을 옮기지 않았고 내가 퇴원하기 이틀 전 그 환자가 병실을 옮겼다. 

그 후로 그녀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2020년 10월.

몇 시간에 걸쳐 암환자의 섬망증상에 대해 글을 썼다. 그러다 갑자기 '이게 잘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암환자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누군가의 고통을 이렇게 쓰면 안 될 것 같았다.

내가 직접 겪은 고통도 아닌 남의 고통을 이리 길게 써도 되는 걸까.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써놨던 글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그리고 결국엔 삭제 버튼을 눌렀다.


능력 부족으로 글 쓰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나는, 그 삭제가 너무 허무해서 남편에게 하소연을 했다.


"오늘 글 쓴 거 다 엎었어. 도저히 쓰면 안 될 것 같아서."

"뭘 썼길래 엎었어?"

"암환자의 고통에 대해 쓰고 있었거든. 섬망 증상에 대해서도 좀 썼고."


그러자 남편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아~ 그분에 대해 썼구나? 우리 옆에 계셨던... 지금 잘 살아계시려나... 너무 아파하셨는데. 어찌 됐든 그분은 좀 행복하셨으면 좋겠어."


남편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그분이 어디에 있든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씩씩한 암환자, 불안한 암환자, 아픈 암환자...


다양한 암환자들이 살아가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그러니 지금도 어디선가 아파할 환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부디 아프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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