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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Oct 24. 2020

나를 언제까지 여기에 둘 생각이야!

아이의 분노

우리 집은 고층이었다. 그 덕분에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아이의 어린이집을 베란다에서 볼 수 있었다.

나는 아침 등원 시간이 되면 베란다에 나가 아이가 오는지를 살폈다. 베란다에 놓여 있는 작은 트램펄린 위에 쿠션을 올려놓고 걸터앉아 20분이고 30분이고 기다렸다.

아이는 차량을 타지 않고 시부모님과 항상 걸어서 등원했다. 시부모님 댁이 10분 거리라 가능한 일이었다.


멀리서 아이가 걸어오는 것이 보일 때면 미소가 절로 나왔다. 나는 서둘러 일어났다. 유리창에 두 손을 갖다 대고 얼굴을 붙였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나중엔 유리도 성가셔 문을 활짝 열었다. 고개를 내밀어 아이를 봤다.

아이는 한 손으로는 할머니 손을, 다른 한 손으로는 할아버지 손을 잡고 신나게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걸음도 가벼웠다. 할머니는 아이의 걸음을 계속 보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앞을 보며 웃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누구도 힘들어 보이지 않아서.


그때 어머님이 손으로 우리 집을 가리켰다. 아마도 아이에게 '저기 현이 집이 있네? 여기서 현이 집 다 보인다~'라고 말해주고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님은 우리 집을 가리키다가 내 쪽을 한참을 쳐다보더니 몸을 숙여 아이에게 무언가를 설명했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 나를 보셨구나.'

나도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는 나를 봤는지 못 봤는지,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할머니 손에 이끌려 계속 손을 흔들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는 계속 기다렸고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4일 정도 지났을 때 나는 더 이상 창문을 열지 않았다. 창문을 열지 않고 베란다 끝에 서서 몰래 훔쳐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후회가 되는 행동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매일 안 좋은 눈으로 며느리의 행동을 살펴야 하는 시부모님께도 죄송스러웠고 무엇보다 염치가 없었다.

'엄마가 집에 있으면서도 아이와 함께 하지 않는다니, 잠깐씩 손만 흔들어 대는 엄마라니...'

아이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참으로 염치없었다.

마치 고아원에 아이를 버려두고 담벼락으로 몰래 지켜보는 엄마처럼.. 아이 앞에 서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내가 모습을 보이지 않은 첫날 어머님이 우리 집을 살피는 것이 보였지만 그 후부터는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았다. 아이는 할머니가 말하지 않으면 굳이 자기 집을 쳐다보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는 그렇게, 아이가 등원하는 오전 하원하는 오후에 베란다에서 몰래 아이를 지켜보았다.




아이가 없는 집에 홀로 있은지 일주일이 지났다. 시부모님은 내 회복에 방해가 될까 봐 아이를 한 번도 데리고 오지 않으셨고 나 또한 아이를 찾지 않았다. 집안은 늘 고요했고, 어두웠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남편은 시댁으로 퇴근해서 아이를 재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나는 혼자였다. 하지만 몸에 아무것도 달지 않은 채 온전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하루에 한 번씩은 청소기를 돌렸고 꾸역꾸역 끼니를 이어갔다. 허리는 점점 펼 수 있게 되었고 걸음걸이도 빨라졌다. 청소를 하고 난 뒤에도 식은땀은 나지 않았다.


나는 시어머님께 가끔 전화를 걸어 아이와 통화를 했다. 매일 할 수도 있었지만... 매일 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픈 며느리가 시댁에 아이를 맡겨놓고 매번 전화로만 안부를 묻는 것이 면목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 데리 갈게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게 죄송했다. 아직 회복이 되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고 오고 싶지 않았다. 어머님이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돌봐 주시고 아이도 할머니를 좋아하니 그곳에 있는 것이 낫다고...

그것이 내 진심이었고 나는 참 나쁜 엄마였다.


주말이 되어 남편은 어머님께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 폰은 영상통화가 되지 않는 기종이었기에 음성통화로만 가능했다. 우리는 어머님과 인사를 하고 아이를 바꿔달라고 했다. 아이는 할머니와 놀고 있었던 듯 심드렁하게 전화를 받았고 내가 말을 걸자 귀찮은 목소리로 '응.. 응' 거리기만 했다. 이내 아빠가 아이에게 말했다.


"현아~~ 아빠 이따가 갈게. 엄마 밥만 챙겨주고 갈 테니까 할머니랑 놀고 있어~"


그러자 아이가 예상치 못한 반응을 했다. 그 반응은 굉장히 격렬했고 놀라웠고... 슬펐다.

아빠 말을 들은 5살 아이는 갑자기 목소리가 떨리며 굉장히 높은 톤으로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나 오늘도 여기서 자? 왜 나는 집에 안 가? 나를 언제까지 여기에 둘 생각이야!"


떨리는 목소리로 폭탄을 던지듯 울분을 내뱉은 아이는 울기 시작했고 그 울음소리는 5살 아이의 울음소리 같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며 우는 아이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아이의 말을 들은 세명의 어른들은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나와 남편은 너무 놀라 전화기만을 쳐다보고 있었고 아마도 어머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이가 그토록 서럽게 우는데도 누구 하나 아이를 다독이지 못했다. 수십초가 지나서야 남편이, 그리고 어머님이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어머님은 아이를 진정시키느라 급하게 전화를 끊었고 남편은 서둘러 시댁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리고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아이 데리고 와. 지금 가면 놀지 말고 그냥, 바로 데리고 와."


남편은 말도 안 된다고 했다. 회복도 안된 몸으로 어떻게 애를 보냐고. 유치원은 어떻게 보내고 하원은 어떻게 할 거냐고, 애 밥이나 제대로 먹일 수 있겠냐고, 자기가 오늘은 잘 달랠 테니 네 몸 많이 회복되면 데리고 오자고.

하지만 싫었다. 좀 전의 아이 목소리는 아이가 태어나 처음 내는 소리였다. 4년을 키우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이의 목소리. 울분과 흥분이 섞여 5살 아이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 내 아이를 당장이라도 데려와야 했다.


남편은 계속 말렸지만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데리고 오라고' 라며 화를 내는 나를 끝내 이기지는 못했다.

"알았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남편은 현관을 나섰다.




아이는 한 달 전 엄마의 입원 때문에 일주일간 할머니 집에 있었고, 그 후 3주 가까이 다시 할머니 집에 있어야 했다.

아이는 아무것도 몰랐다. 자기가 할머니 집에 왜 가야 하는지, 엄마는 왜 갑자기 사라진 건지, 아빠는 왜 밤에만 잠깐 오는지... 그리고 자기는 왜 집에 가지 못하는지..


그때, 내가 아이의 이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려고 노력했다면...

아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눈치챘다면..

나보다 아이를 더 챙겼더라면...

훗날 아이가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집에 돌아온 아이는 너무도 멀쩡하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에게 짧은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장난감들과 아주 긴 회포를 풀었다.

남편과 나는 그런 아이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현이 괜찮네? 집에 오면 대성통곡할 줄 알았는데. 역시 애들은 적응이 빨라."



...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실수였음을, 꽤 긴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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