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경찰 신고 - 트리플 제로(Triple Zero) 000
그날 새벽, 머리가 지끈 거리며 잠이 깼다.
이곳에 온 뒤 스트레스 없이 살아서 그런 일이 거의 없었는데 어쩐지 그날은 그랬다. 2층 침실에서 1층으로 두통약을 먹으러 내려갔다.
약을 찾아서 꺼낸 뒤, 함께 넘기기 위한 물을 컵에 따르는 중... 현관 쪽 창문 밖에서 불빛이 안으로 비추어 들어왔다. 금요일 밤이었기에 옆집에서 늦게까지 파티를 하나보다 싶었다.
그런데 그 불빛이 우리 집 벽을 따라 움직이더니 내가 있는 주방 쪽 큰 창문 밖에 멈춰 섰다. 요즘 외계인 책을 하나 보고 있는데 혹시 그건가 싶어서 가까이 다가갔다. (드디어 나도!)
그때 내 눈과 마주친 것은 ‘다른 눈’이었다. 외계인은 아닌 것 같았다.
그 외계인이 아닌 사람 같은 생명체는 무언가를 손에 들고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문을 열고 있었다.
‘너 누구야?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꺼지지 못해?’
그 새벽 밤, 시간과 공간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외계인일지도 모르는 ‘그’에게 소리쳤다. 혹시 못 알아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영어 발음 하나하나 신경 쓰면서...
그는 크게 개의치 않은 움직임과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별로 놀라지 않은 듯했다. 오히려 다른 놀라움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때 본 그의 눈빛은 어쩐지 초점이 뚜렷하지 않았다.
내 영어가 전달되지 않았나 싶어서 다시 외쳤다. (영어 콤플렉스는 계속된다)
‘여기 우리 집이야! 네 집 아니라고! 당장 꺼져!’
그때 그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미소에 가까웠다. 그리고 처음으로 말했다.
‘여기 우리 집이기도 해.’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이건 호주산 기생충 실사판인가? 이미 같이 살고 있던 건가? 나만 몰랐나? 이 사람 말고도 몇 명이나 더 있는 거지?
별의별 생각을 하다가 다시 정신을 붙잡고 말했다.
‘여긴 00호 유닛이야. 너희 집은 몇 호인데?’
다행히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른 유닛을 말했다. 이제야 상황을 대충 파악한 나는 갑자기 친절하게 설명했다.
‘거긴 저쪽으로 가야 해, 여긴 00호야. 잘못 찾아왔어.’
그는 알아 들었는지 바로 사라졌다. 어디 가도 만취해서 제 집 찾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있구나... 하고 있는데...
다시 그가 불빛과 함께 똑같은 경로로 나타나서 다시 문 앞으로 와서 들어오려고 애를 썼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그는 문 열기를 포기하고 이번에는 마당에 엎드렸다. 아마 이번엔 제 집에 찾아간 줄 아는 것 같았다.
엎드려 있는 그를 바라보면서 이걸 어쩌나 하고 있는데... 등골이 오싹해지는 생각이 엄습했다.
잠깐... 우리 집 마당으로 오려면 옆 쪽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거긴 자물쇠로 잠겨있을 텐데... 지금은 밖에 있는 불청객으로 인해 그 자물쇠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며칠 전 집 주변 제초 작업과 벌레 방지 약을 뿌리면서 드나들기 편하게 자물쇠를 풀어둔 기억까지만 있었다. 작업 후 다시 원상복귀를 해 두었는지 그땐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을 뒤집어가며 생각을 해보고 있는데 그가 일어났다. 이번에는 창문 앞으로 가까이 와서 나를 바라봤다. 집에 들여보내 달라는 눈빛이었다.
그때 2층에서 잠에서 깬 파랑이 내려왔다.
파랑과 나는 그에게 함께 소리쳤다. 여긴 너희 집이 아니라고. 계속 이러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그는 곧 다시 쪽문을 통해 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들어와서 문을 열려는 행동을 반복했다.
결국 파랑은 경찰에 신고했다. 호주에서 ‘000’ 영번을 세 번 누르면 경찰 신고를 할 수 있다.
이론만 알고 있었지 실제로 우리가 한 것은 처음이었다. 역시 무엇이든지 경험이 최고....! 라기보다는 그 상황이 너무 암담하고 싫었다.
이 사람이 정말 동네 사람인지, 술이나 약에 취한 사람인지, 아니면 정말 도둑, 강도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밤에 낯선 사람이 얇은 창문 밖에 서성이는 기분은 쉽게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경찰에 신고한다는 말 덕분인지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던 그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항상 상황이 끝나면 온다는 경찰은 이곳도 그랬다. 20분 정도가 지나고 경찰차가 우리 집 앞에 도착했다. 그제야 문을 열었다. 경찰관 분과 인사를 나누는데 첫 질문이 이랬다.
‘이 바지 너희 꺼야?’
바지? 뭔 소리야? 하고 문을 열고 나가봤는데... 바닥에 청바지가 하나 쭈욱 길게 펼쳐서 있었다. 뭐지? 하다가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아... 아까 그 사람 반바지가 많이 짧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팬티였구나!
- 경찰은 우리 집에 오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그런 사람을 못 봤다고 했다. (20분이면 세상이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긴 하지요...)
- 이런 술이나 약에 취한 사람이 남의 집에 찾아가는 일은 매우 흔하다고 했다. (우린 처음이라고요...)
- 바지를 벗은 것도 몸을 뜨겁게 만드는 약을 먹고 그런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모르는 약이 없군요?)
- 바로 사라진 것을 보니 아마 이 동네(타운 하우스) 주민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결론이 빠르고 심플한데?)
- 우리가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했으나 아마 최근에 이사 왔을 수 있다고 했다. (말은 되지만 아니라면?)
조금 떨어져 있던 더 키가 큰 경찰관분이 곤봉으로 바닥에 놓여있는 청바지를 들어 올려서 나무 울타리에 올려두었다. 정말 동네 주민이라면 그 사람이 나중에 찾아갈 수도 있으니 일단 거기 두자고 했다. 그리고 별일이 다시 생기면 연락하라는 말은 남기고 커다란 두 경찰관분들은 떠났다.
다음날 타운하우스 매니저(관리인)에게 자초지종을 파랑이 직접 통화로 설명했다. (전화는 싫어하지만 문제의 심각성으로...) 인상착의를 설명하자 매니저는 알 것 같다고 했고 확인을 해보겠다고 했다. 아주 특이한 인상착의였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그리고 저 ‘청바지’는 며칠을 이렇게 우리 집 앞에 걸려있었다. 아무도 찾아가지 않자 나는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날 이를 내려서 버렸다.
그 청바지의 주인이 이곳 주민인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주민이더라도 기억이 나지 않아 못 찾아가는지, 기억이 나도 창피해서 못 찾아가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렇게 이 청바지 사건은 의문을 남기고 종결되었다.
아... 쪽문에 걸려있던 자물쇠는 한쪽 고리에 얌전하게 입을 다물고 걸려있었다. (문을 잠그는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이미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라서 내 머릿속 기억은 이미 뒤죽박죽이었고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제대로 잠가 놓았었는지 아닌지 정말 기억이 안 났다.
하지만 내가 아는 나는 아예 깜빡하고 자물쇠를 활짝 열어 놓든, 아니면 제대로 양쪽 고리에 잠가 놓든 했을 것이다. 저렇게 의미 없게 한쪽에 걸려서 잠가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 생각이 깊어지면 끝이 없었기에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세상은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어려워지는 일이 너무도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