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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May 09. 2021

아이스링크 피바다 사건

흑역사 레전드 - 중

뉴질랜드 입국과 동시에 내 ‘없던 일도 크고 황당하게 벌어지게 하는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이것의 발동으로 공항에 5시간 넘게 감금되었다. 결국에는 잘 풀려나서 순조롭게(?) 생애 첫 타국 살기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초반에 능력을 많이 써버린 탓인지 당분간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 중간중간 가벼운 사건들이 있었지만 별일까지는 아니었다. 


친구가 술 먹고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다가 음주운전 단속에 걸려서 너희들 모두 이 나라에서 추방시키겠다는 경찰관님의 위협도 받았지만 별일 없이 지나갔다. 


영어 공부한답시고 카지노에 재미를 붙여서 매일 출근하면서 몇 번 재미를 보다가 결국 꽤 큰돈을 날리고 정신을 차리기도 했지만 대세에 지장은 없었다. 


뭐 이런 아주 사소한 일들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니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별 거 없이 지내는 시절을 보내면서 한동한 힘을 비축한 내 능력은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어느 날 사촌 형,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아이스 링크에 스케이트를 타러 간 적이 있었다. 기가 막히게도 뉴질랜드 오기 바로 직전 교양수업으로 아이스 스케이트를 배웠었다. 끝없는 자신감에 가득 차서 친구들과 어울렸다.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사실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있다고 알렸다. 실력을 뽐내고 싶었지만 꽤 사람이 많아서 마음껏 질주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친구들은 내게 정말 뭔가 배워온 티가 난다며  쭉쭉 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사람들이 얼음판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침 막 얼음을 관리하는 쉬는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텅 비어 가는 아이스 링크를 마음껏 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홀로 달려 나갔다. 한 바퀴를 순식간에 돌고 친구들 앞에 멋지게 도착했다. 멋짐에 대한 환호를 한껏 즐겼다.


그러다 마지막엔 스스로가 너무 멋진 나머지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힘이 빠진 다리 탓에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서둘러 팔을 뻗어 얼굴로 쓰러지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너무 늦었다. 


정면으로 얼음판과 내 얼굴은 부딪혔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얼음판은 무척이나 차가웠고 그 아픔과 충격은 온몸을 굳게 했다.


새하얗게 텅 비어있던 얼음판은 곧 내 시뻘건 피로 가득 물들기 시작했다. 






곧 구조대원이 뛰어왔고 난 부축을 받으며 응급조치를 받기 위해 끌려갔다. 그때부터 기억이 혼미하여 뒤죽박죽이다.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는지 그날이 휴일이라서 집에서 쉬다가 다음날 갔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병원에서는 내 앞니가 윗입술을 관통했고 상처를 꿰매야 한다고 했다.


사촌 형은 병원 예약 및 모든 절차를 책임져야 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정기적으로 다니며 상처를 돌보았다. 마지막으로 실밥을 푼 뒤, 후련해하며 잘 끝났다고 여겼다. (그러고 보니 그 많은 비용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서로의 집에는 걱정하실까 봐 알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이렇게 잘 마무리되는가 싶었는데 한참 나중에 뭔가 불편해서 살펴보니 입술 안에 실밥이 조금 남아있었다. 그래서 다시 병원에 방문해서 A/S를 받았다. 뭔가 일이 계속 생기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때 그 상처는 아직도 내 윗입술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딱히 불편한 것은 아니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늘 그때 그 순간이 떠오른다. 텅 비어있던 얼음판, 붉게 물든 원, 그리고 웅성웅성 모여든 사람들.


어쭙잖은 실력을 뽐내려다 하얀 얼음 바닥을 피바다로 만든 나를 지켜보는 사촌 형 마음은 어땠을까? 일 년에 두어 번 명절 때 만나서 즐겁게 잘 놀던 녀석이 그런 트러블 메이커였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뭔가 일이 계속 터진다 싶었겠지만 그게 나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이땐 내가 다친 거라서 그나마 동정표라도 받을 수 있었다. 남들에게 끼친 민폐는 겨우(?) 그 피를 닦느라 그날 아이스 링크 이용에 차질이 생긴 정도였으니. 


하지만 최고의 민폐 사건이 사촌 형 귀국 겨우 며칠 전에 벌어지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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