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역사 레전드 - 상
20년 넘게 알고 지낸 초등학교 친구들이 내게 자주 하는 말이다. 꼭 나 때문에 벌어지는 일은 아니지만 돌아보니 꼭 무슨 일이 터질 때는 내가 있었다는 공통적인 의견이다. 아마 늘 머리보다는 행동으로 일단 저지르던 게 버릇과 같아서 내가 어떤 식으로든 크게 일조한 게 맞을 테다. ‘무엇이 하고 싶다는 둥, 어디 가고 싶다는 둥’의 의견이 나오면 무조건 지금 당장 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이 친구들은 나를 경험할 충분한 시간과 횟수가 있었기에 경계심을 갖출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다 커서 만난 내 주변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가끔 일이 터져도 그게 나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냥 ‘이런 일도 있구나’ 정도로 느끼고 말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다양한 흑역사를 써 내려갔는데 당연히 우리나라에서만 적용되는 능력인 줄 알았다. 가장 길게 해외 생활을 결심하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 뉴질랜드로 떠났던 20대 중반. 이 ‘없던 일도 크고 황당하게 벌어지게 하는 능력’이 그곳에서도 발휘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뉴질랜드 공항에 도착했다. 10시간 넘는 비행으로 피곤에 절어있었다. 입국 게이트 밖에는 반년 먼저 워킹홀리데이를 보내고 있는 ‘1살 많은 사촌 형’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마음은 든든했다. 혼자서 해외 입국하는 것이 처음이 아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어서 통과하고 쉴 생각뿐이었다.
내 여권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여권이 훼손되어 인식이 되지 않았다. 나는 졸지에 끌려갔고 곧 갇혀버렸다. 그 갇힘이 그리도 길어질 줄은 몰랐다.
내 여권은 사실 세탁기에 한 번 들어갔다 온 게 맞았다.(황당하지만 사실이다) 하지만 잘 말렸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실제로 그 잘 말린 여권으로 중국을 갔다 왔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곤 생각 못했다.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중국에서는 이미 훼손된 그 여권으로도 잘 돌아다닐 수 있었다.(아! 중국다운 커다란 아량!) 그랬기 때문에 이상 없다고 굳게 믿고 그 세탁기에 들어갔던 여권으로 뉴질랜드를 방문했던 것이다. 괜히 혼자 중국을 원망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문제없었다는 설명을 했지만 오히려 ‘중국’이라는 단어가 그들을 더욱 자극했다.(아! 중국의 세계적인 명성!)
소지품 검사가 시작되었다. 1년 치 생활을 위한 터질 듯한 캐리어를 열었다. 의심을 받기 시작하니 모든 것이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우선 현금이 너무 많았다. 왜 통장에 넣고 신용카드를 쓰지 않냐고 물었다. 학생이라서 그럴 수 없다고 해명했다. 믿지 않는 눈치였다.
포장도 뜯지 않은 똑같은 디지털카메라가 2개가 나란히 있었다. 이건 무슨 용도로 가져왔냐고, 장사하려는 거냐고 물었다. 카메라는 사진을 찍는 기계라고, 하나는 내 거고 다른 하나는 친척 선물이라고 했다.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3번을 짐을 풀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어디선가 좀 더 높은 직원이 나타났다. 나는 이미 많이 지쳐있었다. 그 사람은 나를 좁은 사무실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100문 100답을 시작했다.(땅을 밟기도 전에 벌써 유명해짐?)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물어봤다. 영어를 배우러 왔는데 모든 것이 영어로 진행되어 정신이 없었다. 제대로 답변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갑자기 그 사람이 내게 쿠키 하나를 던져주고는 사라졌다. 점심시간이었던 것이다.
벌써 3시간이 지나있었다.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왜 내겐 정상적인 일이 드물까? ‘그냥 포기하고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할까?’ 홀로 갇혀있는 좁은 사무실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러다 뒤통수를 보이던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재빨리 모니터 앞으로 가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읽었다. 위기상황에서는 초인적인 능력이 발휘되는 법이다. 독해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내가 그 많은 영어를 한눈에 모두 파악했다. 그리고 치명적인 부분을 찾아냈다.
분명히 처음에 내가 말했다. 난 영어를 못하고 영어를 배우러 왔기에 내가 하는 말에 부족함이나 오해가 있을 수 있다고.(근데 어떻게 이렇게 말했지?)
점심식사를 마친 그가 돌아왔다. 난 그에게 모니터의 그 부분을 가리키며 진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무심하게 말했다. ‘너 정도면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없어.’
괜히 기분 좋아하며 그렇다면 그냥 한국으로 돌아갈까라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미쳐가고 있었다)
그렇게 조사가 몇 시간 더 지속되었다. 결국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촌 형에 대해 이야기하고 연락처를 말했다. 그 이후에는 무엇이 어떤 방식으로 처리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5시간이 넘어서야 나는 드디어 입국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 넓은 입국 환영석에는 사촌 형과 그 친구들 몇 명만이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형을 만나자 서러움에 눈물이 날 뻔했지만 배고픔에 울 힘이 없었다.
이렇게 내 뉴질랜드 흑역사는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어마 무시했다. 사촌 형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고 한다. 나라는 녀석이 그렇게 위험한 녀석인 줄... 그 이후에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고 했다. 이 녀석이랑 같이 있으면 항상 일이 터진다고... ‘아이스링크 피바다 사건’, ‘스키장 구조대 사건’ 등 대충 떠올려도 굵직한 일들만 여럿이다.
결국 사촌 형은 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했다!
'공항 감금 사건'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