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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Jan 03. 2022

인생에서 제쳐야 하는 사람

그리고 제쳐질 수 있는 나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은 인물. 무엇 하나를 해도 남 다르게 하던 주변인이 꼭 있다. 마음과 몸으로 따라 하기 힘들어 멍하니 바라만 봤다. 같은 상황 속에서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광경을 보곤 한다. 이해하려 노력해본 적도 있지만, 어렵다는 걸 금방 깨치고 놀라기만 반복한다. 인생에서 어떤 것도 좋음과 나쁨으로 정확히 나누어 살 수는 없다. 모두에게 제각각이며 상황마다 다르기에. 그렇지만 가까이하고 싶은 쪽과 멀어지고 싶은 쪽은 구분이 가능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제부터 털어놓을 굉장한 사람과는 다신 만나고 싶지 않다.


" 그렇게 열심히 . 그냥 대충 ." 이런  하는 사람을 알고 지내는가? 다양하게  빠지는 의미를 가진다. '애써도 별거 없어. 중요하지 않은 일이야. 대충  내가 민망해지잖아.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보는 내가 피곤하니  편하게 살자.' 남의 노력을 비방하는 자는 근처에 두면  된다. 열심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하고 싶은데 못한 건지 하기 싫어서   건지 분명하진 않지만, 경험이 없는  확실하다. 열중하고 몰입해  적이 있다면 쉽게 뱉을  없다. 집중하는 결심이 얼마나 어려운  알고 , 행하는 상황의 중요함을 이해한다면 그럴  없다. 그동안 겪은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그들이 공통으로 숨기는 공포를 포착할  있었다. 내심 두려워한다. 열정적으로 쏟아붓는  혹시라도 효과가 있을까 . '이러다 정말 성공하는  아냐? 그러면 너무 무서운데.' 속에 숨은 진짜 심리다. 아니라면 굳이 옆에서 다른 이의 열정 쏟기에 사사건건 김을  필요가 있을까. 노력하기 힘듦을 완벽히 알고 있기에  참고 해내는 사람을 겁낸다.  순간이 모이면 얼마나 위험한지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렇게  알면서도 못하는 자신이 초라해지고,  나가는 이가 행여라도  될까  걱정한다. 끌어내리지 못해서 안달  '발목 잡이'  피해야 한다. 진심으로 응원해주고 마음 써주는 수백만 명보다도   명의 악영향이 훨씬  크다.  되게 돕기는 어렵지만  되게 망치는  쉽다. 자신의 비참함을 막기 위해 달려드는 노력은 생각보다 질기고 억세다.


유독 말을 아끼는 사람이 있다. 말을 하는 것보다 줄이는 게 어렵기에 얼핏 능력자 같이 보인다. 그런데 필요한 말을 하지 않으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반복되면 사람에 대한 의심이 든다. 그냥 말을 안 하는 건지 진짜로 못 느끼는 건지 헷갈린다. 살면서 감사할 때와 미안할 때가 자주 찾아온다. 그게 꼭 눈물 날만큼 고마워서, 아니면 죽을 만큼 잘못해서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누군가 우릴 챙겨주거나 배려해 주면 한쪽 구석부터 따뜻해진다. 남을 신경 쓰게 했거나 혼란스럽게 만들면 반대로 온몸이 부끄러워진다. 따뜻해지고 부끄러워지는 마음을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알 수 없다. 많이 써야 하는 말 '감사해요. 고마워요.'와 '미안해요. 죄송해요'를 쓰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자의 속은 알 수 없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다지만 쉽지 않다. 꺼내놓지 않으면 그게 무언지 도통 알기 어렵다. 하물며 말을 해도 어떤 마음인지 아리송한데 하지 않은 말의 마음을 어떻게 알까? 본인은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표현했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판단은 받아들이는 이가 한다. 감사와 사과의 인사는 입 밖으로 꺼내야 의미가 있다. 마주쳐서 하는 인사도 똑같다. 눈빛과 얼굴로 대충 알은체 하는 것과 목소리로 꺼내서 전하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당신을 보았고 인지했고 그래서 반갑습니다.'라는 마음은 말로 인사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이쯤에서 소박하게 궁금하다. 말을 아끼는 그는 '감사해요, 미안해요'와 함께 사는 다른 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뭘 저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지? 시끄럽고 정신없게. 왜 고마운 거지? 왜 죄송한 거지? 별일도 아닌데.'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다 똑같다. 해야 하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곁에 두고 싶지 않다. 최소한의 예의가 없다면 과묵하다고 할 수 없다. 그저 싹수가 없는 사람이다.


프로 불만러, 프로 불편러. 어떻게든  좋은 점을 찾아내고 끄집어내는 사람을 비하하는 용어다. 다르게 보면서 가지는 시선과 자세는 필요하다고 믿는다. 지금의 현상을 비틀어보고 변화해야  부분을 찾아내는 예리함이니. 다만, 발견에서 멈추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심지어 지겹지도 않게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소름이 돋는다. 불평, 불만은 늘어놓을  있다. 그만큼 상황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말이니까. 부정적인 생각과 말이  핑계와 탓으로 이어지면 곤란하다. 바뀌어야  대상이 스스로가 아니기 때문에 쉽게 비판한다. 본인이 움직이면 달라질 일도 일단 외부로 모든 이유를 돌린다. 이쯤 되면 나도 그가 미워진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좋은 일에 휩싸여 사는 그의 삶이 당연해 보인다. 직접 변해야  부분은 무시하고 지내기에 바뀌지 않고 나쁜 일이 계속 일어난다. 그럴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내는 불평불만은 더욱 커진다. 악순환으로 돌고 돈다. 살아가면 누구에게나 이런저런 일이 생긴다. 누군가는 변화를 위한 행동을 하고, 누군가는 자기 빼고 모두 돌려 까기 바쁘다. 그나마 하는 행동이 입을 놀리는 거라서 무언가 했다고 위안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문제라고 여기면 안타까우니까 외면하는지도 모르겠다. 상황은  우리에게 찾아오지만 통제하고 예측할  없다.   있는  이쪽인지 저쪽인지 몰라도 한걸음 나서보는 움직임뿐이다. 꼼짝하지 않고 이러니저러니 어두운 말에 파묻혀 있다면 달라지는  아무것도 없다. 행동 없는 프로 불만러는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방법을 모른다.


아, 그 사람! 아, 이 사람!

바로 떠오른 사람이 있다면 각별히 조심하자. 각각의 사람일 있고 모두 두루 갖춘  사람의 초능력자일 수도 있다. 위에서 늘어놓지 않은  다른 치명적 단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좋은 사람은 어지간한 면에서  좋지만, 나쁜 사람은 전반적으로  나쁘다는  내가 가진 삶의 경험이다. 하나가 아니면 대부분 전부 아니었다.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  있다. 긴가민가한다면 이렇게 따져보자. 같이 있으면 기운 빠지고 우울해지고 답답하고 불편한 사람인지. 네거티브의 아우라를 온몸으로 풍기고 지내기에 모르려야 모를  없다. 고백하건대   이렇게 지내던 적이 있었다.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이유다. 아쉽게도 아직 일부가 남아있다.  이상 인생에서 제치고 싶은 사람을 조금도 닮고 싶지 않다. 못난 자로 보여서 함께하고픈 사람의 인생에서 억지로 제쳐지기 싫. 내게 좋은 사람이 내가 되도록. 내게 나쁜 사람이 내가 되지 않도록. 이게 바로 <인생의 황금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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