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보다는 행동이 먼저
푸하. 숨을 마시고 차분히 보이지 않는 물길을 가르며 나아간다. 물과 하나가 된 몸으로 흐르듯 미끄러진다. 단조롭지만 명확한 움직임으로 액체 안에서 사이를 좁혀 가며 이동한다. 발이 닿지 않은 채 투명한 배경에 몸을 날려 유유히 비행한다. 둥둥 뜬 두발의 놀림이 만든 활기찬 소리가 경쾌하게 이어진다. 첨벙첨벙. 요즘 가장 편안해지는 시간이다. 물속을 자유롭게 누비는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는 순간. 작은 행동이 쌓여 빚어진 커다란 성장을 눈으로 확인하는 장면. 달라진 모습을 분명하게 본다는 건 기쁨이다.
물을 두려워하는 아이에게 수영을 배우는 처음은 어려웠다. 안전한 환경과 훌륭한 선생님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도 하면 나아진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오늘 무서운 걸 참아도, 다음에 똑같이 무섭다면 물과 친해질 순 없을 테니. 그렇다고 거짓말을 해줄 순 없었다. 내일이면 좀 더 가까워지길 바라는 희망이면 몰라도, 그렇고 말 거라는 장담은 불가능했다. 가능한 말은 단지 '해 봐야 안다'뿐이었다. 내게 그 이상은 무리라고 느꼈는지 아니면 스스로 알아보기로 결심했는지 작은 소년은 기어코 물에 몸을 담그기 시작했다. 빠진 지 오랜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난 지금은 그때의 기억이 어색할 정도다. 물살을 헤치며 유영하는 아들은 이렇게 될 걸 짐작이나 했을까. 최소한 난 아니었다.
처음 글을 쓸 때는 책을 낼 줄 몰랐다. 하고 싶었는데 진짜로 될 줄 몰랐다는 뜻이 아니다. 그냥 몰랐다. 글을 쓰는 길에 책이 있는 줄 알지 못했다. 김빠지는 소감, '하다 보니 되었어요'를 뱉을 수밖에 없다. 만약 책 만드는 게 목표였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라는 추측이다. 이거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가짐은 강력한 추진만큼이나 신속한 포기도 자주 만드니까. 이렇게 쓰면 책이 될까, 저렇게 쓰면 책이 될까 고민하다 한 글자도 제대로 쓰지 못했을 테다. 책인지 글인지 모르겠고, 무언가 쓰고 싶다는 갈증으로 조금씩 적어온 게 힘이 되었다는 뻔한 말을 남긴다. 별생각 없이 해왔기에 지금도 쓰고 있다는 말이 너무 무책임하려나.
망설임은 확률을 따지면서 찾아온다. 몇 %의 가능성이 있는지 재보며 갈등한다. 어디에도 100%는 없기에 결정에는 도박이 따른다. 어렵게 시작해도 불안이 떠나지 않는다. 바로바로 눈으로 결과를 확인하고 싶은데 그런 일은 잘 없다. 애초에 정해놓은 참을성이 적으면 쉽게 그만두고 돌아선다. 눈에 띄는 가능성을 확인하는 건 보통 정처 없이 떠난 자의 몫이다. 되든 안 되든 가다 보면 길이 있겠지 하며 걷던 사람.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던 자는 뒤를 돌아보고 아쉬워한다. 한 걸음만 더 갔으면 나도 할 수 있었는데 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그 한 발짝의 용기는 영원히 돌아선 자의 것이 될 수 없다. 내딛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불확실을 감당하기엔 생각이 너무 많으니.
과한 생각은 행동에 독이다. 따져봐야 소용없는 걸 오래 쥐고 있을 때는 주로 단념을 위한 합리화의 과정이다. 어차피 안 될 거니까, 그러느니 다른 걸 하는 게 낫지. 내버려 두면 그럴듯한 이유를 가장한 핑계는 샘솟는다. 가끔 답도 없는 고민을 안은 채, 하기 싫어서 몇 시간을 망설이고 나면 허무하다. 차라리 그걸 위해 뭐라도 했으면 그놈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올랐을 텐데 하며. 알고도 저지르는 실수를 반복할 때마다 뒤늦은 결론을 내린다. 혹시 생각은 생각하라고 있는 게 아니고, 움직이라는 판단을 내리라고만 있는 게 아닐지. 어버버하게 시간을 낭비하고 나서야 깨우친다. 생각이 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뭔가 하면 잘하고 싶은 게 당연하지만 그게 참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잘하고 싶다고 다 잘했으면 벌써 잘했을 테니까. 그저 멍하니 머리를 비우고 일단 하는 게 맞긴 하는데, 그러면 또 너무 멍청해 보일까 걱정이다. 다행스럽게 잘하는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다. 피겨퀸도 운동할 때는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라며 아무 생각 없이 임한다. 잘할 확률이 높다는 걸 이미 알고 한 게 아니다. 어설픈 기도보다는 그 시간을 아껴서 움직인다. 머리론 이해해도 그냥 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하려고 할 때마다 이게 정말 될까 하는 의심을 지우는 게 만만치 않아서다. 그럴 때마다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게 있다. 안 해보면 알 수 없다는 것. '했다'는 건 언제나 '해냈다'보다 먼저니까.
이과 교육을 받은 탓인지, 태어나길 계산기로 나와서인지 어떤 일에 앞선 따짐이 자동이다. 정답률이 형편없는 쓸데없는 수의 헤아림을 연거푸 하다 보니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성공 확률은 '적다'와 '많다' 사이가 아닐지. 개떡 같은 진리처럼 보이지만 얻을 게 있다. 어쨌든 있다는 말이다. 어차피 맞추지도 못할 건데 '0'만 아니면 되는 거니까. 확률이 없지 않다면 해 볼 수 있다. 우리가 불안한 건 '불가능'일 테니. 그게 아니라면 해보는 거다. 알 수 없는 가능성에 목매지 않고, 가능하다는 희망만 챙겨서. 단, 하지 않으면 확실한 제로란 걸 잊지 말고.
우리가 따지는 확률은 결국 기대의 현실 가능성이다. 실천이 앞서야 눈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기대보다는 행동이 앞서려고 한다. 철저한 계획을 하되 어설픈 예상은 피한다. 급한 성격을 생각에 쓰지 않고 움직임에 쏟는다. 지지부진한 머리 굴림보다는 몸의 날뜀이 낫다고 믿기에. 시도 때도 없는 성장률 확인도 자제한다. 어제보다 얼마나 나아졌는지 캐묻지 않고 해 나가는 과정을 존중한다. 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성급한 욕심도 내려놓는다. 알면 알수록 가성비 안 나오는 일은 관두고 싶어질 테니. 묵묵히 하려면 모르는 게 약이다.
어떤 일의 확률을 가늠하는 태도는 적절한 변명을 찾기 위해서가 아닐까. 아예 시작하지 않을 명분을 세우려고. 혹시 하더라도 덜 노력할 이유를 찾고, 안 되었을 때 덜 실망하려고. 처음부터 하지 않으려는 저울질이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다. 원하는 일을 꼭 하고 싶은데 안 될 걱정부터 앞서면 될 일도 안 되지 않을까. 포기하며 쉽게 던지는 '이건 불가능해'부터가 가짜 같다. 오히려 '지금까진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네'가 진짜가 아닐지. 과거에 한 적이 없었다고 계속 그럴 거라면 우린 지금도 선사시대에 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시도가 막힌 세상은 끔찍하다.
하면 되는 건 없다. 모두 해서 된 거다. 그냥 하자. 지금 이 순간을 헤엄치는 아이처럼, 가만히 글자를 눌러쓰는 나처럼. 확률은 꼭 있다. 하다 보면 언젠가 나아진다. 그때까지 견디는 게 유일한 할 일이다. 잡히지 않는 퍼센티지를 향한 헛손질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