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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Sep 21. 2022

유일하게 받는 위로

'계속' '하는' 사람이 주는

'휙, 휙.' 오늘도 눈이 돌아간다. 현실이든 화면이든 어김없이 한 번 더 보는 사람이 있다. 어쩐지 마음이 조금 더 간다. 오랜 운동으로 탄탄하게 다져진 그를 보면 기분이 좋다. 꼭 선수같이 갖춰진 몸매가 아니더라도 규칙적으로 땀 흘리는 모습이 상상되면 흐뭇하다. 시작하기까지의 귀찮음, 오늘은 대충 할까 싶은 망설임, 끝나고 나서의 개운함을 아는 사이는 뭔가 통한다. 여러 변태 같은 면을 잘 숨기고 살다가도 겉으로 꾸준함이 보이는 이를 만나면 깜빡하고 무장해제 된다. 계속하는 사람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 내겐 있다.


극악무도한 자를 제외하면 세상에 남겨진 이름은 모두 똑같다. 자신만의 일을 계속했다. 그렇지 않고는 회자될 이야기를 남길 수 없다. 기억에 남을 발견, 발명, 성취를 이룬 까닭은 그때까지 해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알려질 사람도 하나같이 꾸준히 해 온 자임이 분명하다. 우리에게 남겨진 사람은 다 그렇다. 끝까지 하지 못하고 멈춘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우린 아무도 모른다. 운이 좋아 잠깐 등장했던 이도 잊히는 이유는 더 하지 않아서다. 하는 사람만 남고 안 하는 사람은 사라지는 단순한 원리로 세상은 돌아간다.


 하든  하든  이유는 제각각 충분하다. 이것 때문에 저것 때문에  때문에  때문에. 모두 거짓이 아니겠지만, 늘어놓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지친다. 하는 사람은 우선 한다. 완벽한 조건이라는  죽을 때까지 오지 않는다. 하고 싶고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한다.  차이를 극복하는  마음가짐의 차이라고밖에  말이 없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방법을 찾지만, 다른 이는   핑계를 찾는다. <긍정적인 사람은 한계가 없고, 부정적인 사람은   없다.>  머리를 '' 하고  받았던 명언이 바로 떠오른다. ' 그렇게 부정적인 사람 아니야.  이유가 있어.    들어봐.'라고 뻔하게 이어지겠지만 관심 없다. 이래서 누구나   있지만, 아무나   없다는 말이 나온  아닐까.


좋아하는 쪽을 바라볼 때는 헤벌쭉 입이 벌어질까 자제하느라 애를 쓰지만, 싫어하는 쪽에는 티를 팍팍 낸다. 괜히 나한테 옮겨붙을 나쁜 기운이 걱정되느라. 말만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의지가 약한 사람도 있을  있지  그렇게까지 하냐라고  텐데, 내게 피해를 줘서 그렇다. 옆에 있으면 오해하기 쉽다. 하려고 마음먹은 10  1번만 해도 아무것도  하는  사람 때문에 뭔가 엄청나다는 착각에 갇힌다.    있는 것도 어설픈 만족감으로 멈추며 도태된다. 입만 살아있는 사람 주변을 피하는 이유다. 같이 있으면 내가 위험해진다.


스스로 게으르다고 하면서 계속하는 자를 독하다고 칭하는 이가 있다. 내 생각은 다르다. 게으른 상태를 알고도 끝까지 유지하는 그가 훨씬 독하다. '게으름'이라는 말을 아름다운 의미로 쓴 게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다. 안타까워하고 자책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움츠러들고 부끄러운데도 꿋꿋하게 계속 미루는 힘의 원천이 궁금하다.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건 대단한 의지다. 자신의 싫은 모습을 바꾸지 않고 머무르는 독한 자가 무섭다.


덕분에 계속하는 게 재능임을 깨달았다. '하면 잘하는데'라는 말은 없다. 시작도 못 하고 꾸준히 못 하는 게 말하는 이의 한계다. 이 핑계 저 핑계 늘어놓으며 그런 거 아니라고, 하기만 하면 언제든 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내밀어도 겁이 안 난다. 하는 것 자체가 능력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입만 나불댈 뿐이니까. 반면교사 삼아 더욱 계속할 수 있으니 고맙기도 하다. 못난 모습을 자주 보여줘서.


노력을   자의 불평도 별로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만큼이나 하자마자 바로  되냐 포기하는 사람도 실망스럽다.  때까지 하는  노력의 최선이다. 하는 데까지 했는데  되었다면 인정해야 한다.  것이 아니라고. 괜히 이룬 자를 보며 불만 꺼낼 필요가 없다. 아니꼬우면  해보는 거다. 투덜댈 기운이 남아있으면  힘으로 한발  나아가 보는 거다. 이쯤에선 전설 같은 그분의 말에 기대서 묻고 싶다. "이봐, 계속해봤어?"


매일 몸을 움직이는 운동 시간이 유일하게 영상을 틀어 놓는 순간이다. 즐거움만큼 몰려오는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데 최근 묘한 발견을 했다. 그동안 정신없이 빠른 박자와 쿵쾅거리는 소리로 혼을 빼놓았는데 우연히 보게  조용한 장면이 나를 사로잡았다. 특별한  아닌 그저  같이 운동하는 사람의 일상을 보여주는 '브이로그'였다. 다른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지속해나가는지 궁금했는데 나와  빼닮은 모습에  빠져버렸다. 그들은 일단 한다. '하면 된다' 말보다는 '해야 된다' 믿고 움직인다. 행동을 이기는 생각 없다고 보여준다. 스스로 약속한 일을 지키며 기쁜 하루하루를 채워 간다. 꾸준함이 만드는 탁월함을 믿으며     내디딘다.


어색한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 나도 그렇게 믿고 살아가고 있었다. 아는 내용을 남에게 듣는 지겨움을  견디지만 어쩐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안에서 울컥하며 올라오는 뜨거운 힘을 느꼈다. 어디서도 받기 어려운 위로를 받고 있었다. 혼자 집중해서 계속하다 보면 힘든 순간이 찾아온다. 이게 도대체 뭐라고 고집을 부리며  나가는 걸까. 뭐가 달라지긴 하는 걸까. 초라해질까  억지 부르는  아닐까. 차라리 아무것도  하고 퍼져있는 편안함이  낫지 않을까. 무엇을 위해 매달리게 되는 걸까. 습관이 몸에 배어 딴생각할 여유가 생길수록 더욱 커진다. 아마 다른 이의 꾸준함이 담긴 영상과 마주한 그때도 주체할  없는 허무함에 발버둥을  즈음이었을 것이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떤 정답을 구해서가 아니다. 답이 없어도 묵묵히 해내는 모습이 따뜻했다. 나만 혼자 낑낑대고 사는  아니구나 싶어서. 그러고 보니 전부터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이 따로 있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달리는 사람을 마주칠 . 주기적으로 올라오는 정성을 다한 글을 읽을 . 음과 박자가 틀려도 굴하지 않고 건반을 두드리는 아들을  . 대상과 목적 상관없이 임없이 해내는 모습을 좋아한다. 계속하는 힘을 사랑한다. 마치  안의 나를 보는 마음처럼 애틋함을 가득 담아 응원하게 된다. 그리곤 나도 그만큼 힘을 얻어 돌아온다. 틈을 주지 않아 어디서도 위로받기 어려운 내가 타인의 꾸준함에 위로받는다.


때늦은 나이에 장래 희망을 세워보자면 '계속하는 사람'이다. 원하고 바라는  있으면 일단 하고,  때까지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만 아는 내가 괜한 욕심을 덧붙여보자면 내가 받는 위로를 넘겨주고 싶다. "얘를 보면 그래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멈춘 사람이 나를 보고 움직이게 된다면 해낸   가장 앞자리를 차지할 테다.  그런 거창한 영향력 없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언제 돌아봐도 하고 있는.   이유 보단  의지를 만들어 내는. 그래서 멈추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꾸준한 모습으로 영원히 남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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