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고 골라도 변하지 않을
모두에게 열려있다는 말엔 희망이 있다. 내게도 기회가 있다는 뜻이니까. 희망 고문은 길지 않다. 근데 너는 아니라는 대답을 듣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모두'가 '누구나'는 아니라고 깨닫고 나면 품었던 기대는 사라진다. 도전의 자유는 있지만 결과까진 책임질 수 없는 공평한 세상을 실감한다. 즐비하게 늘어선 수많은 출판사의 대문을 바라보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지난 거절의 추억이다.
잊어버리길 잘하는 동물이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덕분에 잦은 시도도 할 수 있는 게 인간이 아닐까. 실패의 절망을 딛고 일어섰다기보다는 희미해진 고통을 까먹고 이번엔 다를 거라고 믿는 게 아닐지. 언제 방문해도 멋진 출판사 홈페이지와 SNS 채널은 용기를 북돋는다. '당신의 원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쩐지 나한테만 보내는 DM 같아서 씩 웃으며 '알았어, 곧 보내줄게!'라고 혼잣말로 답한다. 패배의 상처는 어디 갔는지 안 보이고 밝은 장면만 앞다퉈 떠오른다. 여기랑 저기랑 동시에 좋다고 하면 어쩌지. 어떤 기준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까. 현실로 들어가기 전에 마음껏 해볼 수 있는 정신 나간 상상이다. 이렇게라도 스스로 속이지 않으면 막연하고 겁나는 과정을 시작할 수 없다. 언제나 활짝 열려있다는 조건부 희망에 또 한 번 속는 능청스러움이 필요하다. 될까 싶은 두려움을 되고 말 거라는 철없는 용기로 바꾸려면.
오랜만에 덕지덕지 메모가 남아있는 긴 목록을 펼쳤다. 딱 1년 전에 우왕좌왕하며 만들었던 투고 출판사 리스트. 눈길이 가는 건 빼곡한 정보보다는 간략히 빨간 글씨로 남아있는 결과 칸이다. 선명한 붉은색 글자는 전부다 거절로 시작하는데 뒤에 붙은 이유가 절절하다. 가장 눈에 띄는 '분야와 결이 맞지 않음'. 그땐 그렇게나 엉망진창이었다. 제대로 살피지 못했고 책을 만드는 곳이라면 어디든 다 똑같다고 생각했다. 혼자 급해서 따져보지도 않고 엄한 곳에 열심히 물었다. 막무가내 투고 기록을 보면 그때의 불안과 초조가 느껴진다. 우연히라도 제발 하나만 걸렸으면 하는 처절함이 가득한 화면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핑하고 돈다. 진짜 멍청하게 열심이었구나 싶은 안타까움에.
모른 척 지나가도 상관없을 내게 친절한 설명을 연거푸 베풀어준 몇몇 은인 덕분에 나중에야 알았다. 종이가 묶여 비슷하게 보이는 책도 어디가 만드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라고. 출판사마다 만들고 싶은 책이 있어 방향이 다르다면 이어지기 어렵다고. 책만 편하게 읽을 땐 나랑 잘 안 맞는다며 던져버릴 줄만 알았지, 마구 보낸 내 원고가 같은 이유로 던져질 줄은 몰랐다. 이번엔 검토받는 나도 살펴보는 출판사도 소중한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한 꺼풀 벗겨진 눈으로 열심히 뒤졌다. 스타일이 잘 맞을 미래의 파트너를 꿈꾸며.
충분히 보고 골랐다. 무지막지했던 양이 대폭 줄었다. 어울리지 않는 곳은 과감하게 뺐다. 혹시 모르니 한 곳이라도 더 보내보자는 마음도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아닌 곳은 제외했다. 가끔 매력이 넘치는 곳을 발견하면 긴가민가해도 에라 모르겠다며 추가했다. 내가 원하는 출판사의 결이라고 믿고. 어쩌면 이때만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사치다. 보내고 나면 내가 고를 일이 없을 테니. 지금이라도 실컷 이리저리 재보며 골라보자는 마음도 컸다. 곧 사라질 여유를 아쉬워하며 찐득하게 즐겼다.
원고 작성 시간보다 출판사를 고르는 시간이 월등히 힘들다. 구상하고 기획하고 쓰고 고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큼에도 불구하고. 투고를 준비하는 고통은 시간의 크기를 능가한다. 기간을 짓누르는 조급함이 있다. 손에 쥔 원고로 빨리 승부를 보고 싶다. 하지만 대충 성급하게 보내서는 어떤 기회가 어떻게 날아갈지 모른다는 깨달음도 함께 압박한다. 양쪽으로 조여드는 억눌림에 숨도 쉬기 어렵다. 하루에 여러 시간을 들여 출판사를 뒤지고 가진 사상, 펴낸 책, 함께한 작가를 살피는 건 재밌으면서도 곤욕이다. 과연 이 중에서 한 곳이라도 이어질까 하는 가능성 낮은 상상이 시작되면 붙들고 있을 힘은 날아가고 축 처진다. 그럴 때마다 양 볼에 따귀를 날려가며 집중한다. 할 거면 끝까지 제대로 하자고. 고3 때 딱딱한 의자에 오래 붙들려 생기던 엉덩이 종기가 다시 나버린 지금이 헛되지 않도록. 가끔 이런 지독함은 어디서 나오는 고집일까 싶다. 이유를 알든 모르든 변하진 않겠지만.
머리와 손이 멈칫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편지에 뭐라고 적어서 보내야 조금이라도 더 관심 있게 읽어주려나. 하루에도 수십 통씩 쏟아지는 일거리에 불과한 투고 메일에 잠깐이라도 눈길이 가게 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나라면 어느 글에 피식거리며 어디 한번 보자며 자세를 고쳐 앉을까. 고민을 하다 보니 하릴없이 첫 경험의 난감함이 떠올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게 된다. 받는 자에 대한 예의도 없이 내 편한 대로만 마구 적어 보냈던 첫 짝사랑의 고백과 다르지 않았다. 반복되는 무응답과 기계가 보내는 거절 답변은 내가 만들어낸 건지도 모른다. 지나버린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조금씩 써 내려갔다. 원고보다 어려운 건 출간 기획서고, 더 어려운 건 투고 메일 본문이다. 제일 먼저 드러나는 얼굴일수록 부담이 커진다. 여기서 승부를 보지 못하면 다음이 없다는 불안은 충분히 괴로웠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 멈췄다. 복붙의 대명사였던 얄팍한 꼼수의 지난번과는 다르게 출판사별로 나름의 정성을 다했다. 출판사가 만든 책을 읽었던 때를 떠올려 적어 넣으며. 느리지만 꾸준히 해 온 독서가 도움이 되어 기뻤다. 하나씩 정성을 다해서 보냈다. 마음에 남은 책을 내준 곳에 검토 요청할 땐 괜히 오랜 은사님이나 떠나온 친정에 인사를 드리는 느낌까지 들었다. 한동안 깊숙이 고개를 처박고 있다 보니 출판계에 몸담은 줄 착각했나 보다. 무엇보다도 이번엔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 전부 단숨에 보내기로 했다. 이미 지쳐있었던 모양이다. 확실하게 예정된 거절을 미리 받기라도 한 듯.
보낸 메일함을 확인하고 나면 오래 걸리지 않아 받은 메일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사람이 보내는지 로봇이 보내는지 모를 자동 답장이 차근차근 도착한다. 뭐라도 응답이 오면 감춘 기대도 커진다. 다음 작가는 당신이라는 희망찬 문구를 떠올리며 마음을 부풀린다. 안 봐도 아는 내용인데도 혹시나 다를까 싶어 한 글자씩 다시 살펴보면 곧 쪼그라든다. 아주 안 보고 내팽개치진 않을 거지만, 다음 연락은 책으로 내고 싶을 때만 할 거니 큰 기대는 하지 말라는 딱딱한 진실. 하염없이 기다릴까 봐 희망을 간직할 기간도 딱 정해준다. 2주, 3주, 한 달. 그 이후에는 돌아보는 놈이 바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직접 닿으니 차갑다. 흔들리지 않도록 스스로 꼭 잡아본다. 상처 주려 하지 않은 몸짓에 베이면 나만 손해니까.
한나절 만에 사람이 보낸 게 분명한 첫 소식을 접했다. 살펴봤지만 책으로 내기는 어렵겠다는 짧은 문장. 정확한 거절은 깔끔하다. 고칠 수 없는 이유는 알아도 문제라서 아예 없는 게 좋다. 다만 성실하고 빠른 답변에 아쉬운 건 기대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겨서다. 조금만 더 고민해달라는 서운함은 제대로 읽어보긴 했느냐는 의심으로 이어진다. 처음도 아닌 데 왜 질척대나 싶어 얼른 못된 마음을 닦아낸다. 담담해지려는 각오가 벌써 지겨워졌다. 얼마나 많은 '안돼'를 만나야 끝이 나려나.
바다를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덕분에 누구처럼 바로 전화가 걸려 올 일은 없다. 놓칠 연락이 없는 셈이라 편하게 전화기를 멀리했다. 곁에 두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새로고침을 눌러댈 게 뻔하니까. 이럴 땐 멋대로 품는 공상이 최고다. 여기서 하자고 하면 좋겠는데, 아니야 저기도 굉장하잖아. 허튼 생각은 너무 오래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현실과 구분을 못 해서 나중에 더 화만 날 수 있다. 모든 걸 담아 떠나보내고 난 당일은 좀 편안하다. 투고 원고는 우선순위가 높지 않아 정해진 날에 따로 검토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기준에 못 미쳐 탈락하더라도 곧장 얻어맞는 일은 적다. 온갖 미래를 계획하며 널브러지기 제격이다.
아침부터 신경을 곤두세운 탓에 평소보다 일찍 자리에 누웠다. 읽던 책을 조금 읽다 금방 피곤해져서 불을 껐다. 원래는 자기 전에 급한 연락이 있는지 핸드폰을 한 번 살피고 자는 데 그날은 고민이 많았다. 잠들기 직전에 갖는 기분은 전체 꿈자리를 결정한다. 기다리는 소식이 없으면 없는 대로 속상할 거고, 바라지 않는 이야기를 들으면 억울해서 답답할 테고. 깜깜해진 천장을 쳐다보며 멀뚱거렸다. 궁금해서 잠을 못 자는 것보다는 낫다며 설득하고 편지함을 열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소식 속에 낯선 요청이 끼어 있었다. 나를 만나고 싶다는. 하루 만에 받은 소식에 어안이 벙벙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