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Joon Apr 30. 2022

의심병 도진 초보 작가

계약은 했으나 병은 못 고쳤고

의심이 많다. 아무도 못 믿는다. 내가 안 하고 남이 하면 걱정이 크다. 일터에서 스트레스받던 건 온전히 내 탓일지도 모른다. 행여나 리더를 시켜줬어도 의심병이 도져서 혼자 일을 끙끙 안고 있다가 곧 나가떨어졌으리라. 중요한 일은 직접 하고자 한다. 몸과 정신이 고생하더라도 내 마음이 편하다. 부탁하거나 시켜놓고 잘하고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건 체질에 안 맞다. 남이 해오는 일을 향한 원초적 불신을 안고 산다. 어쩌다 내려놓고 맡기는 건 그 일이 어떻게 되든 별 상관이 없을 때뿐이다.


품고 사는 지병 탓에 누구와 함께 일한 경험이 많지 않다. 다른  으쌰 으쌰 힘을 모아 하나보다 나은 둘을 증명한 적이 별로 없다.  말고는 쉽게 인정을  해서 의견을 모으는  서툴다.   아니면     하나를 고르는 결과로 몰고 가는  익숙하다.   만에 날아온 출판사의 새로운 기획 방향을 마주했을 때도 온몸이 마비된  멈췄다.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악착같이  입장을 고수해야 하는지. 나만 옳다는 생각, 그리고 누구도 나만큼  책을 고민할  없다는 명제가 닫힌 문을 잡고 열어주지 않았다.


밝혀온 출판사의 지적은 명명백백 옳았다. 좀 더 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기 위해 방향을 수정하자, 그리고 열어두기보다는 한쪽에 무게를 둔 뚜렷한 결말을 보여주자. 안 해봤던 고민이 아니라서 더욱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허투루 보지 않았다는 안심은 잠깐이었다. 곧 지금처럼 결정을 내린 나만의 이유를 과연 이해하고 있겠냐며 의심이 도졌다. 오랜 시간 고민해 썼던 나보다 더 나은 의견을 낼 수 없으리라는 오만에 지배당했다. 적당히 대세에 지장이 없는 타협할 만한 부분만 받아들이고 붙들어 두고 싶은 영역에선 발을 빼지 않았다. 깨끗하지 못한 인정이 티가 났는지 파트너는 전화 회의를 요청했다.


투고로는 거의 책을 내지 않습니다. 작가님 원고가 재밌고 완성도가 높아서 바로 연락드렸어요. 사심 가득한 선택이라고 해두겠어요.

의심병 환자는 귀를 의심했다. 가물에  나듯 듣던 '글이 좋다' 말과는 달랐다. 그건 기껏해야 어쩔  없이 팔이 안으로 굽은 아내, 또는 오래 알고 지낸 착한 지인에게서 나오는 친밀함이 섞인 의무감에 가까웠으니.  시간도 넘게  통화의 내용은  마지막  한마디에 전부 묻혔다. 솔직하게 원하는 앞으로의 편집 방향을 신나게 털어놓았는데 기억에 남은  없다.  의견을 존중한다는 훈훈한 마무리만 희미하게 떠올랐다. 전화기를 내려놓고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칭찬이 불편한 초보 작가는 서툰 초고를 향한 타인의 인정을 쉬이 믿을  없었다. 손에   불안을 한동안 내려놓지 못했다.


강하게 내뱉은 그날의 억센 입김 탓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러려고 했던 참인지 모르겠지만 공은 내게 돌아와 있었다. 어렵게 조율해서 맞춘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한 원고의 수정, 보완 의견을 먼저 말해달라고 했다. 출판사의 목소리가 앞서 전해지면 백이면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흘러간다고. 작가가 원하는 바를 완전히 담지 못하면 끝에 가서 양쪽 모두 아쉬워진다는 설명. 내심 나는  만큼 했으니 어디 한번 당신들 이야기  들어보자는 자세였는데 듣고 보니 그랬다. 누가 뭐래도  사람은 나고 표지에 박힐 지은이  자는  이름일 테니.


자세를 고쳐 앉고 어디에 무슨 글자가 있는지 다 아는 원고를 다시 읽었다. 글은 처음에 쓸 때가 제일 편하다. 나름의 기준으로 다 쓰고 나서 고치라고 하면 꽉 막힌다. 하나하나 이유가 있어서 남겨둔 문자를 같은 사람이 들여다보며 바꾸려는 모양만큼 어정쩡한 게 있을까. 제삼자로 빙의해서 남의 것 보듯 첨삭하면 참 좋겠지만 어디 그게 쉽나. 마치 자식에게 부족한 면을 샅샅이 찾아 고백하는 고통이 이렇지 않을지.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예쁘고 귀한 녀석에게 칼질할 틈을 찾지 못해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넣기만 반복했다.


포근한 바람은 생뚱맞은 곳에서 불어왔다. 공개해  초고 널찍한 곳에 노출되어 많은 사람이 읽었다. 들여다볼수록 과연 타인에게 의미가 있으려나 싶은 의구심에 푹푹 빠져들던 참이었다. 읽고 남겨준 애정과 공감, 그리고 의도치 않은 위로에 대한 감사가  어루만졌다.  글이 도움이 되고 필요한 이가 저편에 있다는 손짓을 확인했다.  곳을 잃고 방황하던 내게  줄기 빛이 내렸다. 원고를 살릴 방법이 퍼뜩 떠올랐고 바로 적어 보냈다. 우연인지 기적인지 모를 찾아온 기회 속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단호하게.


주고받는 의견이 쌓일수록 의심도 같이 늘었다. 날 존중하는 태도와 결정은 촘촘한 의심망을 좀처럼 빠져나가질 못했다. 더 좋은 방안이 없어서 안 꺼내는지, 고집스러운 작가는 피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관두는지. 나은 기획과 원고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가혹하게 두들겨 맞기를 자청했지만 뾰족하게 돌아오지 않았다. 첫 번째 책을 만들었던 경험이 선명하게 남은 탓이다. 처음으로 받아본 출판사 의견이 가득했던 원고를 앞에 두고 목뒤까지 시뻘게졌던 그때. 숨을 기운도 없이 민망했지만, 나중엔 모두 피와 살이 되었다. 나로선 아무리 들여다봐도 볼 수 없는 지점을 찾아주는 보물 같은 체험을 다시 하고 싶었다.

 

급기야 대놓고 물어보기에 이르렀다. 수줍은 첫 경험까지 언급하며 우리는 언제 덕지덕지 빨간 표시를 할 거냐고.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으려나 싶은 불안감을 풀지 못하고 책임을 넘겼다. 어설프게 알면 걱정만 커진다더니 경험 적은 초보자는 안절부절못했다. 마침 영원한 내 편, 아내가 책 만들기는 어떻게 돼가냐고 물어서 조목조목 전달한 메일을 보여줬다. 주르륵 읽고는 한 마디를 남겼다. "그쪽도 이런 놈은 처음 만났겠는데. 너무 일하듯 하는 거 아냐?" 아무도 믿지 않고 미친놈 같이 일하던 버릇이 삐죽 나와 있었다. 막무가내로 치켜세우는 모양새가 인생에서 가장 의심이 많던 그때로 돌아가게 한 셈이다. 작은 깜냥 그릇에 담지 못해 흘러넘친 인정과 칭찬이 의심으로 붉게 변한 채. 내 서명만 빠져있는 출간 계약서가 아직 눈앞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결국 계약을 했다. 가졌던 의심이 모두 풀려서는 아니었다. 나를 내몬 건 다른 이유였다. 작지만 귀한 배려가 촉촉이 쌓여 남을 믿지 못하는 내게 신뢰의 디딤돌을 만들어 주었다. 언제나 내 상황을 우선시했고, 약속된 일정은 꼭 지켰다. 사소한 의견도 존중했고, 부족하지 않게 설명을 보탰다. 조급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다독여주며 괜찮다고 말했다. 중요한 존재로 대우받는 경험이 낯설었지만, 천천히 마음의 문이 열렸다. 결정적인 건 쏘아붙이듯 늘어놓은 질문 공세에 따뜻하게 화답한 전화였다. 별 내용은 없었다. 그저 초조해하는 내 기분을 하나씩 꼼꼼히 알아주고 걱정하지 말라며 달래주고 끝났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선의의 행동에 감동했고 결심했다. 여기랑 일해도 되겠다고.


속까지 합이 맞은 다음부터는 수월하게 흘러갔다. 추가할 원고를 찬찬히 구상하며 지냈다. 필요한 시간을 마음껏 쓰라는 상대의 의견을 흔쾌히 따르면서. 앞으로 힘겨운 과정이 많겠지만 쓸데없는  의심만 줄이면 문제없을 테다. 어느덧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 찾아왔다. 바로 '제목 정하기'. 출판사에서 고심 끝에  가지 후보안과 설명을 붙여 보내왔다. 기대를 가득 안고 살펴보았고 곧장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어렵게 싸매 두었던 고질병이 도지고 말았다. 또다시 의심이 퍼져나갔다. 빠져나간 녀석을 잡아   있으려나.

이전 24화 욕심 많은 외도가 가져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