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Joon Apr 02. 2022

욕심 많은 외도가 가져온

한 번의 허락과 수많은 거부

만나고 싶다는 낯선 요청과 함께 날아든 투고 당일의 출간 제안. 내 것일 리 없던 일이 벌어졌다. 고백하건대 처음은 아니었다. 첫 책을 투고했을 때도 단 몇 시간 만에 러브콜을 받긴 했었다. 비록 출판시장이 어려워 최소 300권은 작가가 사야 한다는 사기꾼이었지만. 불쾌한 경험 덕에 의심의 눈초리로 찬찬히 살펴봤다. 첫 책의 투고 과정에서 받은 몇 번의 승낙에도 만나자는 이야기는 없었다. 내가 그곳에 없기 때문에 당연한 이해였다. 만약 몸이 떨어져 있다는 사정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미팅을 요청한 거라면 신뢰할 수 없었다.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상대라면 어떤 일도 같이할 수 없기에.


앞뒤를 살펴보니 그런 건 아니었다. 복직과 퇴직의 갈림길에 선 내가 휴직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귀국한다면 그때 꼭 직접 보고 싶다는 희망 담긴 문의였다. 출판사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따뜻한 마음의 표현인 셈이다. 당장 벌어질 계획은 없었기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른 문장을 살폈다. 기존에 받아보지 못한 새로운 지점의 감동이 있었다. 고민해서 적은 투고 메일 인사말에 대한 칭찬. 출판사의 색깔과 결에 따라 마음을 달리 담아 보냈는데 알아주며 언급한 곳은 처음이었다. 절절한 사연을 읽었을지 모를 반대편에게 일방적인 침묵과 축약된 거절을 연거푸 받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정성을 콕 집어주는 귀인을 만날 기회는 그만큼 드물다. 마음을 알아주는 내용 뒤에는 원고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인정이 뒤따랐다. 같은 시선으로 앞으로 태어날 책을 그려보고 있었다. 내 것이 되었구나 싶어 바로 딴생각을 품었다.


'이게 최선입니까?' 하나가 되고 나니 배부른 고민이 딸려 나왔다. 온몸을 저리게 했던 감동은 지나간 지 오래였다. 화장실을 수만 번 다녀와도 변하지 않는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차이와 같았다. 쓸데없이 예리한 척 분석을 좋아하는 나답게 출판사를 꼼꼼하게 뜯어봤다. 가진 장단점을 늘어놓고 만들고 싶은 책과 이리저리 맞춰봤다. 난 완벽하지 못해도 남에겐 빈틈없기를 바라는 데 선수다. 강점보단 눈에 걸린 약점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걸 포기하지 못한다. 뽐내기도 할 겸 옆에 있는 아내, 파랑에게 자랑 같은 고민을 털어놓았다. 축하를 건네며 듣던 파랑은 간단하게 답했다. 이번 책의 장르와 출판사의 강점이 잘 맞아떨어져서 좋다고. 그것만으로 충분히 결정을 내릴 만하다는 단호한 조언에 놀랐다. 작은 쿠키 한 조각을 고를 때도 인생을 건 듯 오랫동안 최선을 위해 고민하는 파랑이 이럴 줄이야. 다른 출판사 답변이 오기 시작했으니 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할 줄 알았다. 대꾸할 수 없는 단단한 태도에 고맙다며 딴생각을 안 보이게 감추었다. 여전히 믿는 구석은 따로 있었다. 너무 빨랐던 첫 번째 허락은 끝없는 자신감을 북돋웠다. 지금 하는 고민을 월등하게 뛰어넘는 곳이 나타날 거라고 여겼다.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거라고.


모든 건 계획대로 흘러갔다. 우선 전과 다르게 답장이 부쩍 많아졌다. 첫 책 투고할 땐 받을 수 없었던 출판사에서도 회신을 줬다. 그땐 대놓고 씹었던 것인가 씁쓸해지다가 딱히 할 말이 없는 답장은 나 같아도 안 보냈겠다며 빠르게 인정했다. 돌아오는 내용에도 변화가 있었다.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더 잘 읽어주고 반응하는 듯했다. 받아봤자 형식적인 거절 인사에 불과했던 게 지난번이라면 이번엔 이러저러한 멘트가 곁들여졌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복붙 투고에는 복붙 답장이, 개별 투고에는 개별 답장이 돌아왔다.


확실히 처음과 두 번째는 달랐다. 첫 번째 책을 낸 경험과 경력이 힘을 발휘했다. 도대체 지금보다 더 아무것도 아니었던 처음엔 무슨 용기로 덤볐는지 모르겠다. 되고 말 거라는 확신을 어디서 가져와서 미친 척 두르고 걸어갔는지 모를 일이다. 차라리 미쳐있길 참 잘했다. 상황을 이성적으로 바라봤다면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을 테니까. 1년 더 젊었던 그땐 다행히 좀 더 제정신이 아니었다. 뭐든 처음이 가장 어렵다. 그때의 내가 떠올라 갑자기 칭찬을 마구 해줬다. 덕분에 지금이 수월해서 고맙다고.


거절은 여전히 뼈 아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안 된다는 건 슬펐다. 이런 건 좋은데 결국 못 하겠다는 건 안 좋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더 많이 그리고 좀 더 풍성하게 듣는 예의 바른 거부는 감질나게 괴로웠다. 수도 없이 뭇매를 맞았던 첫 경험 덕에 맷집이 생겼을 법도 한데 역시 매에는 장사가 없었다. 그러려니 하다가도 쓰린 냄새가 속에서 울컥 솟았다. 구구단처럼 외워진 변하지 않는 레퍼토리를 보는 건 눈이 시렸다. 우린 다르다며 확실히 갈라서게 만드는 출간 방향, 내게 내어줄 틈은 없다는 꽉 찬 출간 계획, 마음인지 몸인지 돈인지 알 수 없는 자꾸 부족하기만 하다는 여력까지. 진짜 끝까지 읽은 거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도착하는 붉은색으로 채워지는 편지함을 들락거렸다. 답장이 오지 않은 곳의 숫자가 줄어들수록 품었던 희망도 함께 쪼그라들었다.


세찬 거절의 행렬 속에서 손을 처음으로 내밀어준 출판사와 밀고 당기는 질의응답을 이어 나갔다. 나는 사실 합리화의 달인인데 스스로 설득하기 위해선 합당한 정보가 필요하다. 객관적일 필요는 없다. 나만 고개를 끄덕일 만한 자료가 갖춰지면 마음을 고정하는 건 연습이 잘 돼 있다. 궁금한 내용을 남김없이 쉬지 않고 물어봤다. 날카롭거나 핵심을 짚는 게 아닌 떠오르고 바라는 대로 다소 구질구질하게 다 꺼내서 전했다.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책으로 만들어 봤는데 이놈의 책이라는 걸 사람들이 참 안 읽더라, 내 책이 잘못된 건지 아닌지 확인을 하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읽어줘야 통계적 유의성을 검증할 텐데 답답해 죽겠더라, 너희는 어떤 장점이 있어서 좋은 책을 만들어서 잘 팔리게 할 수 있는지 말해줄 수 있겠니. 편한 말로 속내를 풀어놓으면 대강 이런 식이었다. 절박해 보일 수도 무례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확실히 속사정을 알고 싶어서 가릴 것 없이 말했다. 대꾸가 시원찮으면 그럼 그렇지 이 바닥도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무명은 답이 없다며 떠나려 했다. 답변은 예상을 벗어났다.


구체적인 자료와 가진 장점을 제시했고, 필요한 점과 아무도 알 수 없는 영역도 확실하게 짚었다. 입장을 바꿔놓아도 할 수 있는 대답의 최선이었다. 도리어 당황한 난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연달아 뱉어냈다. 마땅한 대안이 나타나지 않는 상황은 날 더욱 쪼잔하고 궁핍하게 몰아붙였다. 하필이면 날 만난 출판사는 투정인지 불평인지 모를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알려줄 수 있는 부분을 솔직하게 들려주었고, 나와 함께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무엇이든 편하게 이야기해달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다고. 재촉하지 않고 바라봐주는 따스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런 경험이 처음인 초보 작가 지망생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굳건한 고무신이 있으면 외려 딴마음을 쉽게 품는다는 군인처럼 혹시 다른 연애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나 습관적으로 우편함을 뒤적였다. 사람의 욕심은 정말이지 끝이 없었다.


덤덤해질 법도 했지만 상처는 무뎌지지 않았다. 인연이 아니라는 말을 웃으며 넘기기엔 속이 좁았다. 마음이 패일수록 의심이 차올랐다. 그럴듯한 '안돼'의 이유를 뒤집어 묻고 싶었다. 만약 회사의 상황이나 여건 다 빼고 개인의 생각은 어떤지. 좋은 책으로 만들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는 마무리 인사의 진실은 무엇인지. 여긴 아니니까 돌아가라는 친절한 안내를 빼고 나면 정말로 다른 곳에선 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건지. 좋은 점이 있어도 부족하다는 건 나쁜 점이 훨씬 크기 때문인 건지. 물어볼 수 없는 지질한 질문은 영원히 답을 구할 수 없을 테다. 풀 수 없는 문제 사이로 아내의 응원이 도착했다. "나중엔 반대로 출판사를 고를 수 있지 않을까?" 웃으며 "그런 일은 없을 거야."라고 확실하게 답했다.


문득 예전부터 간직하고 있던 궁금증이 새어 나왔다. 책을 낸 작가의 다음 출판사가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기만 하면 무조건 성공해서 서로 모셔가는 대작가를 제외하고. 결이 맞고 경험이 나쁘지 않았다면 다음 책 출간을 가장 먼저 의논하는 건 직전에 함께 작업했던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예 가능성을 타진하지 않았던 건지 따져봤으나 결렬된 건지. 돌아선 주체는 작가일까 출판사일까. 더 나은 곳이 있을 거라는 희망에 애초에 돌아보지 않았던 걸까. 두 번째 책을 도전하는 내게도 적용되는 상황에 대한 설명은 깔끔하다. '에세이'라는 분야를 다루지 않아서다. 첫 번째 책도 만약 이유 없이 멋져 보이는 이 외래어를 끝까지 고집했더라면 책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묻지 않았다. 뻔한 결과가 뒤집히길 바라는 건 내 성격과 맞지 않아서.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새로운 동반자를 만나보고 싶었다. 이미 정한 지 오래인 마음을 괜히 돌아보는 이유는 세상을 먹어버리겠다고 뛰쳐나간 아이가 따뜻한 집이 그리워서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데 물어라도 볼 걸 그랬나 싶어서. 아무리 휘적여도 손에 들어오지 않는 드넓고 냉정한 출판 세계에 던져져 있다 보니 드는 잡생각이다.


끝까지 기다렸던 마지막 답이 왔다. 알아듣게 똑똑히 적어 보내줘서 감사했다. 써먹을 곳 없는 가능성과 여전히 안 된다는 닫힌 결론이 분명히 새겨져 있었다. 엄청나게 어려운 일생의 고민을 하고 말 거라며 꼭 쥐고 있던 긴장감을 하릴없이 놓아주었다. 복잡한 객관식을 기대했으나 단순한 OX 문제로 판명 났다. 처한 상황에 맞춰 내 안의 합리화는 착착 진행됐다. 이만한 곳이 없다고 대박의 기운이 느껴진다며. 마치 바람피우던 놈이 연인의 소중함에 감탄하듯이. 언제부터 출판사 고를 엄두를 내었냐며 모자란 자신을 꾸짖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달 동안 조용히 모든 응석을 받아주며 기다려준 처음 그곳에 함께하자고 편지를 써서 보냈다.


만났던 그날처럼 날이 바뀌기 전에 고맙다는 연락을 받았다. 기대를 뛰어넘는 반가움의 표현에 괜히 찔끔거리기도 했다. 내가 뭐라고 . 당연한  받았던 정성 가득한 답변과  담겨 있던 함께하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돌아 돌아 그제야 보였다. 언제나  위하고 기다려주는 마음이 크게 다가왔다. 검토를 위해 보내준 계약서에도 놀라움이 들어있었다. 전형적 이과생답게 숫자를 먼저 확인했는데 전보다 커져 있었다.  번째 책이라 그런 건지 출판사의 방침이 그런 건지 몰랐다. 물어보면 고쳐질까 가만히 있었다. 좋은  마음대로 해석하고 만족하면 끝이다. 나에 대한 인정으로 삼아 꼭꼭 담아두었다. 투고 원고와 출간 기획서를 바탕으로 출판사의 편집 방향이 담긴 기획안으로 돌아오겠다고 했다. 앞으로 어떤 책으로 만들어  것인지에 관한 고민과 입장을 담아서. 내가 먼저 만약의 만약을 생각해서 계약은 기획안 확인 후로 미루자고 했다. 서로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리는 미래가 다르면 함께   없으니.


약속한 날짜가 다가올수록 궁금증과 기대가 커졌다.  책도  오래 기다린 뒤에 출판사의 생각을 받아볼  있었는데 그때의 깨달음이 아직도 생생하다. 책으로 만들려면 어떤 부분을 신경 써야 하는 배웠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아이의 초음파 사진을 기다리는 느낌과 비슷했다. 태어날 아기의 모습이 궁금한 만큼 어렴풋이 보이는 윤곽이 어찌나 사랑스럽고 소중하던지. 남은 기간이 줄어들수록  자주 메일함을 확인했다. 세는데  손이 필요 없을 때쯤 반가운 보낸 이가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근데 있어야  첨부 파일은 없었고 예상 밖의 소식만 있었다.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도장을 찍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