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열고 눈을 모아 좇는 따뜻함
글은 중간에 아무도 끼어들지 못해서 좋아한다. 말로 하는 대화나 글자로 나누는 채팅과 다르게 즉각적인 상대방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답변을 받아 들고 머리가 하얘져서 준비했던 내용을 모두 잊을 일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천천히 내 호흡에 맞춰 가지런히 적으면 된다. 읽을 독자를 떠올리며 요리조리 둘러보며 끝까지 준비하지만 그뿐이다. 쓰는 동안 직접 나타나 이렇다 저렇다 의견을 들려줄 일은 없다. 의식하지만 실제로 닿을 일 없는 완벽한 여유는 글쓰기의 재미다. 살을 맞대고 부딪힐 없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고요한 시간을 즐긴다.
글만큼 말하기를 좋아한다. 누군 말이 부담되고 서툴러서 글이 편해 글자 뒤에 숨는다고 하는데 난 어찌 된 모양인지 아직도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글에 담지 못하는 온기 가득한 육성의 떨림은 또 다른 매력이다. 전부는 아니고 글과 같은 말하기만 좋아한다. 도중에 난입하지 않는 확보된 영역에서 하는 말이 내 취향이다. 발표, 프레젠테이션, 연설, 강연, 강의 등 여러 경우가 있는데 다 비슷비슷하다. 타인의 화법과 말투에 쉽게 눈이 돌아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탓에 실시간 대화는 점점 힘들어진다. 오랜 시간 혼자 준비해서 정해진 시간에 들어줄 사람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게 스타일에 맞는다. 귀를 열고 눈을 모아 나를 좇는 따뜻함이 좋다. 관심을 갈구하는 어쩔 수 없는 특징은 내 것이 맞다.
혼자 말하기를 즐기려면 합당한 준비가 필요하다. 대책 없이 멍하게 서서 귀한 시간 내어 앉아있는 분들에게 피해를 입힐 순 없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스스로도 모른 채 연단에 올라 어버버 하면 안 된다. 누구도 끼어들지 않는 특권이 보장된 만큼 무대를 장악해서 밀고 당기고, 들었다 놓았다 하며 빠져들게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철저한 준비와 수많은 연습은 필수다. 다루고 싶은 내용이 많지만 자연스러운 흐름을 위해 핵심만 남겨야 한다. 자료는 과하지 않게 하지만 충분한 도움이 되도록 절제한다. 해야 할 말은 자료에 맞춰 미리 준비한다. 기본적인 걸 갖췄으면 다음은 반복뿐이다. 실제로 진행하듯 계속해본다. 지겨워지고 입과 목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해야만 그나마 실수가 적다. 마치고 나서 남는 아쉬움을 줄이려면 한 번 더 연습을 하는 것 말고는 없다. 바로 직전까지 입으로 몸으로 하고 또 해본다. 그만하자고 밑부터 끓어오르는 욕이 목구멍까지 치닫고 나면 다 된 거다. 본 무대는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만다.
다행히 마치고 나선 끝났구나 라는 후련함만 남았다. 빠뜨린 내용이나 전하지 못한 말은 없었다. 아무도 나를 막지 않는 한 시간은 굉장히 독특한 순간이다. 내게만 허락된 순백의 장면을 마음껏 칠하고 꾸밀 수 있는 경험은 어디서도 쉽지 않다. 다른데선 마음대로 살기 어려우니 어쩌다 생기는 기회를 탐닉해서 철저하게 내 것으로 만든다. 막이 내리고 나면 또 다른 탐욕의 시간이다. 들어주신 분의 따뜻하고 힘이 되는 말만 골라서 열심히 담는다. 처음엔 잘한다 잘한다 위주로 챙겨 듣는다. '재밌어요, 정곡을 찔러요, 디자인 감각 있어요, 오늘 강연 정말 짱!, 센스!, 임팩트 있는 훌륭한 프레젠테이션 진행, 감동 공감 소통 3박자 모두 맞춰진 멋진 시간, 여유롭고 훈훈한 시간을 만드는 배우고 싶은 발표 스킬.' 외울 정도로 흠뻑 느끼고 나면 그제야 내용에 대한 코멘트로 넘어간다.
준비한 내용은 그동안 해오던 이야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아빠라는 명함을 들고 헤매던 지난날과 달라진 지금, 그 깨달음의 과정을 그대로 전했다. 글과 책이 아니라서 좀 더 극적으로 실감 나게 와닿도록 애를 쓴 차이가 있을 뿐. 글자에 담을 수 없었던 목소리의 온기를 전하려 노력했다. 느껴주신 분들의 한 말씀 한 말씀이 가슴에 새겨졌다. '혼자서 거대한 세상과 맞서 싸우는 기분이었을 것 같아요, 엄마 입으로만 듣던 고충을 그대로 아빠 입으로 듣네요, 추천 책 표지 보자마자 눈물이 핑, 국회로!, 남편 강제로 들어왔다가 감동받고 나갔어요, 늘 남편에게 이야기하던 부분이라 공감하면서 몰입해서 들었어요.' 눈에 물이 찰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마음이 전해졌다는 감동은 쉬이 가라앉지 못했다.
끝났다. 한 달 동안 함께 달려온 세계 곳곳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교롭게 마지막 순서가 되어 오래 기다리느라 힘들었지만 대미를 장식하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지나온 새로운 경험은 다음을 좀 더 수월하게 기대하게 만든다. 회사를 떠나 사람들 앞에서 처음 해 본 강연은 용기를 남겼다. 아직 죽지 않았구나라는 만족보다는 앞으로도 계속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챙겼다. 모니터 뒤에 숨어 몰래 타자만 치고 끝났을 나를 무대로 이끌어 준 <패런트리(Parentree)>에 무한한 감사를 전한다.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부족한 내게 귀 기울여주신 여러 분의 공감과 응원을 잊지 않겠다. 전했던 마지막 인사처럼 언젠가 다시 만나 반갑게 마주하기를.
세상에 반하는 아빠가 결정한 육아휴직이 글이 되고 책이 되었다. 영상이 되고 강연이 되었다. 부족한 깜냥으로 간당간당 버티며 한 숨을 돌리던 참에 새롭게 또 다른 놀라운 곳에서 연락이 왔다. 변화를 위한 내 의지를 알아준 것 같아 무척 기뻤다. 부담되고 앞 길이 막막하지만 늘 그래 왔듯 잘 해낼 것을 믿는다. 난 완벽한 내 편이다. 이어지는 새로운 도전도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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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 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