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Joon Mar 30. 2022

슬기롭게 갇혀 지내기

골드 코스트 락다운 여행 (하)

밤과 술에 취한 나는 느지막이 일어났다. 나보다 일찍 잠든 사람들은 잠에 취해 더 늦게 일어났다. 세상은 무언가 바뀐 듯했지만 또 그냥 그대로였다. 코로나로 인한 락다운*이 시작되었지만 숙소에 머무는 시간들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동 제한령, 봉쇄령. 시행된 지역에서는 야외 활동이 금지되고 오도 가도 못하게 됨)


바뀐 방침으로 아침을 식당이 아닌 방에서 먹었다. 어김없이 훌륭했다. 잘 먹고 넓은 방에서 각자 나름의 휴식을 취했다. 파랑이 해야 하는 중요한 작업이 생겨 아들과 함께 산책을 나섰다. 마스크는 나만 써야 했기에 아들이야 말로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널찍한 골프장 주변을 다니면서 혹시 날아올 골프공을 살피며 다녔다. 마구잡이로 날뛰며 가끔 요구사항을 들어달라는 아들은 여유로운 여행의 마음 덕에 수월했다. 조용하고 넓고 깨끗한 분위기는 안락했다.


파랑도 하던 일을 마치고 합류했다. 차를 타고 나섰다. 우선 아들을 위한 '펀 드라이브*'를 즐겼다. (*아들이 원하는 대로 운전하기, 안전운전 필수!) 마치 의도했던 것처럼 이곳저곳을 휘젓는 덕분에 처음 가보는 곳들을 구석구석 구경했다. 으리으리한 부잣집 동네(욕실이 6개?)로 시작해서 공동묘지와 기차역까지. 갇혀있을 시간을 위한 새로운 아이템을 장착했다. 매번 도서관에서 빌려보거나 중고샵에서 1~2불로 득템 하던 DVD를 새 상품으로 척척 샀다. 아들이 원하는 거 1개, 파랑이 원하는 거 1개, 내가 원하는 거 1개. 한인이 운영하는 초밥집에서 테이크 아웃 후 편안한 둥지로 돌아왔다. 푸짐한 아침 덕에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넘은 상태였다. 특별한 일정에 구애받지 않는 우리 여행 스타일대로 배고플 때 먹으면 그게 식사 시간이었다.


먼저 아들의 초이스 <소닉>을 시청했다. 이건 최소한 10번째 보는 거다. 근데 볼 때마다 재밌다. 참 잘 만든 가족 영화다. 다음은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 미리 준비해둔 샴페인을 열었다. 영화와 밤과 술이 있는 시간은 뜨끈하게 흘러갔다. 나의 조심성 없는 말에 상처받은 파랑은 아들과 먼저 침대로 향했다. 술기운을 핑계로 사과할 타이밍을 놓치고 그날은 그렇게 따로 잠들었다. 영화가 끝나자 술과 밤도 끝났다.


천국 같은 그곳에서 세 밤을 자고 난 네 번째 날. 원래의 일정은 나머지 두 밤을 브리즈번에서 보내려고 했다. 락다운으로 불가능해졌고 지금 있는 골드코스트에 더 있기로 했다. 문제는 어디서 머무르냐였다. 난 당연히 이 지상낙원에서 계속 있기를 바랐지만 파랑과 아들은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넷플릭스가 없어서. 우리 집은 티브이도 잘 안 켜고 넷플릭스는 당연히 없다. 이렇게 여행에 와서야 즐긴다. 락다운까지 벌어졌으니 그들의 요구는 합당해 보였다. 2대 1의 싸움. 질 수밖에. 멀지 않은 곳의 에어비앤비로 파랑이 예약을 마쳤다. 검색 조건은 딱 하나. '넷플릭스'가 있는 집. 마지막 아침을 룸 서비스로 제대로 즐겼다. 유독 더 맛있고 양이 많았다. 떠나려는 우리를 붙잡으려고 했던 건 아닐까? 



RACV 로열 파인스 리조트 골드 코스트 




새로운 보금자리는 포근했다. 원하던 넷플릭스뿐만 아니라 자매품(?) 디즈니 플러스도 이용할 수 있었다. 근처를 돌아볼 겸 점심 먹을 겸 밖으로 나섰다. 일식당에서 도시락을 테이크 아웃했다. 근처 한인 마트에서 저녁거리도 사서 돌아왔다. 도시락은 깔끔했다. 할 일이 있는 파랑을 테이블에 모셔놓고 나와 아들은 글자 놀이 게임을 했다. 영어로 철자 맞추기를 같이 할 수 있는 녀석이 새삼 신기했다. 준비한 저녁을 먹으며 아들이 고른 영화를 즐겼다. 아주 오래된 <벅스 라이프>. 예전에 봤는지 안 봤는지 가물가물했지만 놀라운 영화임에는 틀림없었다. 바깥세상이 락다운인지 아닌지 느낄 새 없이 하루가 저물었다.



Daiki Japanese Restaurant




드디어 락다운 마지막 날. 그날 저녁 6시면 풀릴 예정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온 가족이 운동을 함께 했다. 파랑이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을 틀어놓고 함께 불살랐다. 몸이 풀린 우리는 집을 나섰다. 아침을 먹기 위해. 한인 분식집에서 김밥, 쫄면, 야채튀김, 김말이를 사서 공원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설 수 없기에 차를 세워두고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며 음식을 흡입했다. 와, 제대로 하는 집이었다. 특히 김말이는 최고. 완벽한 바삭함, 적당한 크기와 간. 배를 채운 우리는 비에 젖은 공원에서 잠깐의 자유를 누렸다. 가장 답답했을 아들이 원하는 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에너지를 발산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다행히 시간은 금방 흘렀고 방에서 대기하던 우리는 6시에 맞춰 뛰쳐나갔다. 락다운 해제 후 우리의 첫 행선지는 당연히 식당이었다. 이름도 멋진 '곱창 가즈아'! 곱창, 대창, 생갈비 모두 좋았고 특히 밑반찬과 된장찌개가 기가 막혔다. 정신없이 먹다 보니 사진도 거의 못 남겼다. 행복하게 배를 채운 우리는 (임시) 스위트홈으로 돌아가 영화를 보기로 했다. 어떤 것을 볼까 고르다가 내가 마음이 상해 먼저 잠들었다. 마지막 날 밤에 괜히 분위기를 흐린듯해서 언제 풀어줄까 고민하다 일어나니 다음날 아침이었다. 돌아보면 애초에 의지가 약했던 것 같다. 아이와 맞먹으려 들었던 나. 대단하다.



두리분식 

Gobchang Gazea




그렇게 여행이 끝났다. 여행의 마지막 날은 며칠이든 몇 달이든 똑같다. 한결같이 아쉽다. 지난 시간들이 언제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생각이 안 난다. 아쉬움이 여러 번 반복되어 이번엔 좀 더 꾹꾹 눌러 담아야지 해도 지나고 나면 비슷비슷하다. 짐을 싸고 뒤를 한번 돌아본 뒤 집으로 향했다. 아, 마지막 전리품을 위해 한인마트에 들렀다. 차를 가득 채웠다. 그 사이사이 우리의 이런저런 추억도 함께 놓여있었다. 다음이 있을 것을 확신하며 반가운 집으로 돌아왔다.






이 브런치는 이런 곳입니다.

이 작가와 책을 만나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그곳에 평생 갇혀 살고 싶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